철학 실험가들

Posted 2008/04/02 21:57, Filed under: 누가누구
정회원
Maya: 환영과 환술

마야(māyā)는 환영(幻影)이고 환술(幻術)이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척. 아무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있는 척. ‘척하고’ 있음으로 인해 영원히 어둠의 수인(囚人)이다. 무명(無明)이기보다 미명(未明)이기를 원한다고? 빛을 거부하는 사신(死神)의 춤사위이기 때문에 투명하리만치 깜깜한 유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없는’ 무대에서 ‘없는’ 관객 앞에서, 이상야릇한 희열이나 환희를 담은 연극으로서, ‘없는’ 유희! 클릭



Oxys: 날카로운 부드러움, 시린 사랑

나는 지붕과 창에 세차게 휘몰아 치는 애절하고 열정적인 빗소리를 좋아합니다. 내 사랑은 아마 그와 같을 것입니다. 봄날 연한 풀빛 새싹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내 마음입니다. 나는 시골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얗고 모호한 연기입니다. 그것은 나의 그리움이자 열정입니다. 나에게는 낙엽 태우는 붉은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명쾌한 논리, 심플한 디자인, 달콤한 과일들, 무엇보다 여성적인 사람의 여성적 아름다움을 가장 좋아합니다. 나는 낙천적이고 종종 외롭습니다. 나는 지적이고 종종 감성적입니다. 나는 외향적이고 종종 내성적입니다. 나는 논리적이고 자주 문학적입니다. 나는 과학적이고 자주 신학적입니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야외 벤치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바람 부는 봄날 자전거 타는 걸 좋아합니다. 나는 글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연애편지. 나는 연애편지로 철학실험을 합니다. 클릭



준회원
고운: 알콜과 니코틴향을 사랑하게 된 어느 날

하루 24시간 동안 나는 얼마만큼 내가 원하는 곳에 집중하고 있는가. 계산적인 판단을 피하며 얼마 동안이나 나를 위한 시간을 공급하고 있는가. 얼만큼 나는 나를 위로하는 말미를 남겨두고 있는가. 나는 즐거운가? 나는 곳곳의 사물에 만족하는가? 눈 감으면 팽팽 도는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게 집중하는구나. 나는 내게 위로하는구나. 내게 주어진 사물을 인정하라. 사랑하라.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라. 사랑하라. 멀어지려함을 이해하라. 인정하라. 의미를 느꼈다면 덮어두라. 이해하라. 사랑하라. 우울한 구름이 머리 위까지 채워지는 풍경에 말하라. 종을 울려라. 사랑한다 말하라. 그립다 말하라. 완전치 못하고 아슬아슬함을 동정하라. 갈구하고 불안해함을 감싸안으라. 큰 날개를 펴고 너의 불충만을 보담으라. 클릭



NidA: 무지향적 광기와 대안의 설계

보수적인 도시의 반항아-이 KidA: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다면, 어른은 커서 또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차라리 저는 언제나 단 한사람의 아이이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언제나 그랬듯 니다입니다. 따라서 저는 당신에게 언제나 키다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제 이름은 "Nothing"입니다.

언젠가 후배이자 친구인 "밤바람"(June, 1980~)으로부터 '보수적인 도시의 반항아'라는 징표를 부여받은 적이 있다. 그 후로 나는 이것을 나를 표현하기 위한 일개의 이마쥬로 사용하고 있다. 카뮈(A. Camus)가 천명하였듯이 '반항'이란 인간의 정체성 해명과 밀접한 존재론적 감수성이자 반응성이며, 나는 이 '반항'을 통해서 타자와의 관계를 구축한다. 클릭



수면중
아이딤: I Deem, I Dream

사람의 얼굴, 사람의 말과 행동 속에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나는 사람의 손을 통해 발견하곤 한다. 손의 색깔과 온도, 피부의 부드러움, 딱딱해진 굳은살과 자잘한 기스같은 상처들. 무엇보다 손을 잡았을 때에 느껴지는 손아귀의 힘과 근육들.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한 사람의 경험과 성장배경, 성격과 직종까지 시건방지게 넘겨 짚어 보곤 한다. 이제 나의 손을 섬뜩하게 도마 위에 올려 본다. 튀어나온 마디마디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빛깔, 손등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상처들... 이 손은 과연 믿을만한 사람의 손으로 보일까? 신뢰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의 손처럼 느껴질까? 클릭



머리에 꽃을: 병든 마음 손에 들고

인간들이 모여만든 공동체는 나의 다른 모습을 억누르는 거래를 통해 형성된다. 대자연 속에 등장하는 인간, 또는 그 인간의 시선은 인간들에게 위로를 준다. 서글픈 위로와 뻔한 희생양에 지나지 않는 상호교환. 그저 내가 더이상 가혹한 인간이 되지 않기를 빌 뿐이다. 상상 속의 세계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환상적인 시각물은 뜯어보면 기형적이다. 그 기형적이지만 환상적인 부조화속에 진실이 있다. 나는 당신의 아이러니를 존중한다. 클릭



離還: 떠남과 돌아옴

리환 離還은 ...... 굳이 의미를 따지자면, 떠날 離 돌아올 還, 곧 떠남과 돌아옴의 교차일 게다. 그런데 떠난 다음에 다시 돌아온다는 것인가, 또는 떠나면서 동시에 되돌아온다는 것인가? '다음에'의 경우에는, 시간의 계기에 따라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떠나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천신만고 끝에 돌아옴을 의미하는 것이자 하이데거가 <횔덜린의 송가>에서 이야기한 잃어버린 고향을 다시 되찾음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동시에'의 경우에는? 떠남과 돌아옴, 이별과 만남이 동시에 교차하면서 진행되고 또한 겹쳐지는 동시성의 비동시성과 중첩성의 비중첩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논리적으로는 역설이고 수사학적으로는 모순형용인 이 사태는 삶의 근원적 모순을 표현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리환’이 어느 것을 지칭하든 어쨌든 삶은 지독히 불가해한 것이니까. 클릭



Ecce: 나를 보라!

라틴어 ecce는 동사로 ‘-을 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라틴어 성경의 신약 요한 복음서를 보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면서 ‘예수를 보라’고 유태인을 향해 외친다. 평생 기독교와의 대결 속에서 철학함philosophieren을 수행했던 니체는 이것을 익살맞게 패러디한다.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알베르토 광장에서 힘에 벅찬 짐을 끌면서 무지막지하게 채찍을 맞고 있는 말의 목을 부여안고 쓰러지기 1년 전인 1888년 12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이 자서전을 쓰게 된다. 자서전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이다. 클릭



초빙회원
리드미: 인문학적 감성의 징검다리

군용 물품의 두 가지 목적은 휴대성과 내구성이다. 다른 것 없다. 이를 위해선 아무리 무거워도 되며 아무리 못생겨도 상관없다. 좋아하는 군용 물품은 좀 무겁긴 해도 미려한 외관과 실용성을 모두 겸비한 야삽이다. 산에서 볼 일을 봐야 할 때 가져가야 할 필수품이기도 한데 막상 일을 치르기 전에 야삽을 이용해 사전 작업을 하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클릭


2008/04/02 21:57 2008/04/0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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