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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가 잘못 걸어온 길

분석철학 : 2007/04/17 18:57


1. 들어가는 말

경험주의는 오직 경험만이 인식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의 한 입장이다. 경험주의와 경쟁하고 있는 합리주의는, 비록 경험의 인식론적 역할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만, 경험에서 주어지지 않은 내적 원리들을 인식의 필수적 요소로 간주한다. 이러한 합리주의자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경험주의는 인식이론의 챔피언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여태 잘못된 길을 걸어왔으며 이 이론은 결국 인간 인식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점을 드러내기 위해 경험주의 역사를 요약하고자 한다. 먼저 경험주의의 기본 패러다임을 특징지었던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을 소상하게 설명한 후, 로크의 관념이론을 거쳐 흄의 회의주의까지 경험주의의 역사를 개괄할 것이다. 근세 경험주의는 회의주의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정은 현대 경험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경험주의를 전통 인식론의 전형적 패러다임으로 규정한 다음, 전통 인식론에서 무시했던 요소(타자)를 지적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오른쪽 그림은 유전에 관한 엠페도클레스의 단편 일부.)

2. 엠페도클레스에서 아퀴나스까지
기원전 5세기경 엠페도클레스는 물이 술과 쉽게 섞이지만 기름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관찰했다. 또한 그는 사냥개가 사냥감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이런 현상들을 동시에 설명하는 소위 방출이론을 개발하였다. 방출이론은 다음과 같은 세 전제를 가지고 있다.

• 방출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방출물”을 내어놓는다. 예컨대 사냥감의 발에서 방출물이 떨어져 나와 풀밭에 남겨진다.

• 구멍: 만물은 방출물을 내어놓거나 받아들이는 “구멍”을 가진다. 예컨대 사냥개의 코는 사냥감의 방출물을 받아들이는 구멍을 가지고 있다.

• 들어맞음: 한 물질의 방출물은 다른 물질의 구멍에 딱 들어맞거나, 아니면 크기가 맞지 않아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물과 술은 서로 들어맞는 구멍과 방출물을 가지고 있지만, 기름과 물은 그렇지 않다.


방출이론은 지각작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물질이 방출물을 내어놓듯이, 지각 대상 역시 각종 방출물들을 사방으로 흘려보낸다. 그 방출물들은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그 모양과 크기에 따라 어떤 것은 색깔을 표상하고, 어떤 것은 소리, 냄새 등등을 표상한다.

시각의 경우, 시각대상의 방출물은 빛이고, 눈의 구멍은 막대형 또는 원추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출물들이 주체에 도달하면 그것들은 적절한 감각기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 중에서 감각기관의 구멍에 들어맞는 방출물은 감각기관 안으로 유입될 것이다. 이를 통해 마침내 시각작용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물체로부터 빠져 나온 빛 흐름이 눈에 부딪힐 경우, 그것이 눈의 구멍에 들어맞는 한, 우리는 색깔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소리를 볼 수 없고 색깔을 들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소리 흐름은 눈의 구멍에 들어맞지 않고 다만 귀에 들어맞을 뿐이며, 소리 흐름은 눈에 들어맞지 않고, 색깔 흐름은 귀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고 발생의 메커니즘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한 물질 안으로 다른 물질의 방출물이 유입될 때, 그 물질은 화학적 또는 생리학적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 육체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감각대상의 방출물이 감각기관을 통해 육체 안으로 유입되면, 주체의 육체는 변화를 겪게 되고, 바로 이 변화에 의해 지각과 사고가 발생된다. “사람의 신체 상태가 변하게 되면, 언제나 그 변화만큼 다른 사고가 나타난다”(단편 108). 특히 엠페도클레스는 영혼과 혈액을 동일시했는데, 특히 한 주체의 육체 안으로 유입된 방출물이 혈액과 섞임으로써, 혈액 속에 특정 원소가 증가하면, 그 주체에게 그 원소에 관한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하여 질료적 유사성은 감각적‧지각적 유사성을 낳는다. “우리는 흙으로써 흙을 보고, 물로써 물을, 공기로써 밝은 공기를, 불로써 활활 타는 불을 보며, 사랑으로써 사랑을, 다툼으로써 치명적인 다툼을 본다”(단편 109).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에서 중요한 점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동형동질성을 통해 인식가능성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데모크리토스(위)는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을 보다 정교화했다. 그는 지각작용을 소위 “이미지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사물의 표면은 그 사물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는 박막deikela을 방출한다. 이 박막은 감각기관에 타격을 가하여 원자운동을 통해 영혼 속으로 전송된다. 전송된 박막은 영혼의 원자들과 상호작용함으로써 감각기관 속에 사물의 이미지(eidola; 윤곽)를 재형성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시각작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시각대상 O는 자기와 모양이 유사한 원자들의 박막을 분출시킨다. 이 박막은 주체 S의 눈 표면에 O의 이미지를 인상한다(찍어낸다). 그러면 S의 눈에 O의 영상(반영)이 생기고, S는 그 영상을 통하여 O를 보게 된다. 외부 사물로부터 방출되는 박막이 감각기관에 인상을 가함으로써 생긴 사물의 영상이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상은 장차 근세 경험주의자에게 매우 익숙하게 된다.

데모크리토스에게 지각작용이 일어날 때 바깥 사물로부터 영혼 안으로 유입되는 것은 질료(박막)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형상eidos을 단순한 질료와 구별 지은 후, 지각작용 중에 영혼 안으로 유입되는 것이 질료가 아니라 형상이라고 결론 내렸다. 내가 사과를 지각할 때, 내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사과의 질료가 아니라 사과의 형상이다. 사람이 집을 볼 때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집의 형상은,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마음 속에 떠올리게 되는 집의 형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마음 속에 존재한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생각을 발전시킨다. 내가 사과를 지각하거나 생각할 때, 사과 형상이 내 마음 앞에 나타난다. 질료 위에 사과 형상이 출현할 때 그 질료는 사과가 되듯이, 내 마음 속에 사과 형상이 출현할 때 내 생각은 사과 생각이 된다.

3. 로크에서 흄까지
근세철학자들은 우리가 지각하거나 사고할 때 마음 앞에 나타나게 되는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해 “관념”idea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로크(오른쪽)에게 관념은 마음 앞에 나타나는 직접적 대상이다. 로크의 관념이론은 그의 동료 보일 Robert Boyle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로크의 이론은 고대 원자론자의 방출이론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일단 모든 물체는 공통적으로 보편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보편질료는 다시 지각불가능한 미립자(입자 또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미립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된 사물의 성질을 “제일성질”이라 한다. 제일성질은 물체가 가지고 있는 또는 물체에 붙어 있는 성질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 속에 “관념”을 유발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관념은 제일성질을 표상하는, 말하자면 제일성질의 복사물이다. 사물에 붙어 있는 제일성질과 감각에 의해 발생된 그것의 복사물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이 성립한다. (오른쪽 그림은 만년의 로크, Godfrey Kneller 경의 1697년도 작품.)

로크는 감각에 의해 직접적으로 유발된 관념을 “단순관념”이라 불렀다. 인간 지성은 직접적으로 수용된 이 단순관념들을 비교하고 추상함으로써 새로운 “복합관념”을 조합해내는데, 이렇게 조합된 복합관념이 곧 사고이다. 로크의 인식론은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미립자들로 구성된 바깥 세계로부터 세계의 제일성질들이 주체에게 유입된다.

• 제일성질은 마음 판에 관념(제일성질의 반영물)을 찍어낸다.

• 관념들이 연합하여 사고를 만들어낸다.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는 고대 방출이론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근세 인식론자들은 주로 셋째 단계의 해명에 집중했다.

로크 이후의 경험주의자들은 로크의 패러다임을 하나씩 허물기 시작했다. 버클리는 첫째 단계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첫째 단계는 바깥에 정신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사물을 가정해야 한다. 일단 이러한 사물을 가정하면, 데카르트식 이원론을 받아들여야 하거나, 홉즈식 유물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버클리는 어느 쪽에도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바깥 사물 자체를 거부한다.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신과 그의 사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속에 있는 관념은 신 속에 있는 관념의 복사품이지, 외부 물질적 사물의 성질이 아니다.

흄은 둘째 단계를 문제 삼는다. 로크는 비록 텅 빈 판이긴 하지만 관념이 맺히는 마음 판의 존재를 가정해야 했다. 그러나 흄에게는 외적 실체뿐만 아니라 관념이 맺히는 내적 실체까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흄은 로크에 이어 셋째 단계를 해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에 따르면 인식은 감각에 의해 생긴 단순관념들이 관념연합을 통해 복합관념을 형성할 때 달성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관념연합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사고 중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흄의 회의주의이다.

흄은 오직 부주의와 무관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존재를 믿게 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들은 대부분 관습이나 습관과 같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만들어진다. 흄은 「인성론」(1739, 왼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불은 따뜻하고 물은 시원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이유는 다르게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치러야 할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책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시나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취향과 정서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회의주의를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믿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흄은 회의주의가 가장 날카롭고 가장 주도면밀한 탐구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기 때문에 이것만이 유일한 철학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만 믿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한 회의주의적 사색으로는 결코 억누를 수 없는 자연의 불가항력이 자신의 회의주의를 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결국 그는 「인성론」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식사를 하고 주사위 놀이를 한다. 나는 친구들과 대화하며 유쾌하게 웃는다. 서너 시간 동안 즐긴 다음 내가 다시 이 회의주의적 사변들로 돌아왔을 때 이 사변들은 아주 냉담하며 부자연스럽고 엉뚱하게 여겨지므로, 나는 내 마음에서 더 이상 사변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일상사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절대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결정된 나 자신을 발견한다.”

4. 선형 인식론
데카르트 이후 근세 인식론자들은 지식들이 응당 튼튼한 토대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보고, 인식의 토대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인식의 토대로 삼으려 했다. 그들의 이러한 전략을 흔히 토대주의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가? 합리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에 대한 내 생각(코기토)이고, 경험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데이터)이다.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답변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공통적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모두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것은 코기토든 데이터든 내가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곧 내 마음에 관한 나의 앎이다. 그렇다면 가장 덜 확실한 인식 형태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마음 상태에 관한 앎이다. 그 중간에 세계에 관한 앎이 놓여 있다. 전통 인식론의 패러다임은 내 마음에 주어진 자료(주관적 앎)로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앎(대상에 관한 앎, 객관적 앎)을 경유하여, 마지막으로 타자 마음에 관한 앎(상호주관적 앎)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나는 이 패러다임을 선형linear 인식론으로 부르고자 한다.

선형 인식론의 좋은 사례는 버클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버클리는 그의 주저 「인간인식원리」(1710)의 예비작업으로서 「신시각이론」(1709)을 출판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주관의 세계 구성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면서, 주어진 2차원 시각적 평면 지각으로부터 3차원 입체 세계를 구성하려 했다. 왜냐하면 3차원 물체는 결코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물체를 처음부터 상정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버클리는 세계 구성이 오직 나에게 주어진 자료, 즉 주관적 표상(지각 또는 관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버클리의 자아는 저기 바깥의 지각 대상이 자아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버클리식 자아와 바깥 사물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 거리도 없다. 따라서 안에서 출발하여 바깥으로 직선적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는 대부분의 경우에 현상론(표면superficial 인식론)으로 귀착되거나 유아론(점punctual 인식론)으로 함몰되고 만다.

내적 대상에 관한 인식으로부터 외적 대상에 관한 인식으로 나아가려는 근세 인식론의 이러한 기조는 현대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카르납은 감각인상(단순관념)으로부터 외부세계를 구성하려는 근세 경험주의자들의 기획을 계승한다.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성」(1928)은 이 시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카르납은 주관적 자료로부터 세계그림을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카르납은 “문화적 대상”, “타인의 정신”, “물리적 대상”, “우리 자신의 정신 자료”를 구성의 주요 대상으로 간주하는데, 그에 따르면, 이 중에서 인식론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신 자료이고, 그 다음 물리적 대상, 그 다음 타인의 정신, 마지막으로 문화적 대상이다. 카르납은 자아의 정신 자료가 인식론적으로 제일차적이라는 가정을 “유아론적 기조”라 이름 붙였다. 이 유아론적 기조를 따를 때, 타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나의 정신 자료와 물리적 과정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윤리적‧사회적‧정치적 논제들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자료에 근거하여 판단된다. 카르납의 “구성”은 자기 마음의 자료 위에 세계와 타자 인식의 기둥을 세우는 것이었다. (위 그림은 1998년에 출판된 Alan W. Richardson의 책 Carnap's Construction of the World: The Aufbau and the Emergence of Logical Empiricism.)

그에게 세계 구성의 첫 단계는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2차원 시각적 감각질을 3차원 공간으로 투영시키는 구성이다. 이를 위해 카르납은 안구의 구면에서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직선을 도입한다. 시각적 선분들은 망막에 맺힌 시각적 패턴과 바깥 세계의 시각적 평면을 연결시켜 준다. 문제는 각 선분의 길이이다. 각 선분은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카르납은 가장 단조롭고 가장 완만한 가능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각 선분 끝에 색깔(색상, 명도, 채도)을 할당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물리적 세계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데 결국 실패하게 된다. 콰인카르납의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과학적 연구결과들을 인식론에 끄집어들인다. 그는 사고의 상호주관성과 객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선택에 의한 예정조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콰인의 평행론은 비록 그가 물리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흄과 카르납의 인식론이 그랬던 것처럼, 데카르트적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유아론적이다.

5. 나오는 말
후기분석철학자 데이빗슨은 관념, 인상, 표상, 감각자료, 신경유입 등과 같은 주관적인 것이 객관세계에 관한 지식 즉 객관적 지식의 기초라는 발상을 “신화” 또는 “독단”이라고 주장했다. 이 신화의 결말은 상대주의‧회의주의‧유아주의이다. 타자를 애초부터 배제한 뒤 주체로부터 세계로 나아가려는 인식론들은 인식 기둥을 확고히 하기는커녕, 종국에 가서는 “점 인식론”으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세계인식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까지 상실한다. 이 점은 버클리카르납의 인식론에서 잘 배울 수 있다. 버클리는 「신시각이론」에서 시각 대상이, 촉각 대상처럼 저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 년 뒤 출판된 「인간인식원리」에서는 촉각 대상까지도 마음 안에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렇게 버클리의 선형 인식론은 점차 점 인식론으로 함몰된다. (옆 그림은 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ers 시리즈 중 하나인 The Philosophy of Donald Davidson.)

선형 인식론이 점 인식론으로 붕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인식 구조의 한 축으로 도입해야 한다. 실제로 플라톤에서 현대까지 타자의 중요성이 은연중에 주장되어 왔다. 플라톤의 아남네시스(상기)는 타자와 대화할 때 발생한다. 소크라테스는 타인과 오랜 대화가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임을 감지했다. 데카르트는 자아를 기만하지 않는 지선한 타자를, 버클리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전지한 타자를 필요로 했다. 이처럼 인식론에서 타자는, 비록 어렴풋하긴 했지만, 낯선 것이 아니었다. 만일 경험주의가 인식에서 타자의 구성적 역할을 수용하지 못한다면, 이 인식이론은 인식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할 것이다. 이 점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 엠페도클레스부터 콰인까지 경험주의가 잘못 걸어왔던 길이었다.
030114 초안, 050115 일차수정, 050212 리스타일링.

Empiricism is the view that all knowledge is based on or derived from experience. Empiricism is commonly contrasted with rationalism, according to which proper knowledge springs from the operations of the faculty of reason, rather than being based on experience. In spite of rationalist's continuing attacks, empiricism remains as the champion of epistemology.

The aims of this post are to summarize the basic notion and paradigm of traditional empiricism, and to criticise it. As preliminary discussion, I introduced a naive and primitive empiricist theory, say effluxes theory. To review effluxes theory of Empedocles and Democritus in detail can help to understand Lockean empiricism.

In his main philosophical work,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published in 1690, John Locke criticizes and rejects the widely held view about the origin of our knowledge. According to the widely held view of Descartes and many other comtemporary philosophers, fundamental principles and ideas are innate. However, Locke argues that all ideas are ultimately derived from experience. Hence all knowledge must be acquired.

For Locke, ideas are the very units of thought, in other words, the basic data of knowledge. However, they are essentially subjective. From theses subjective and private data, all empirical knowledge, including knowledges about external objects and other minds are constructed, step by step, block by block.

In fact, starting with Descartes, modern epistemology has been almost entirely based on the subjective evidence, for example, Cogito, idea, impression, sensation, sense-data, stimulation, and neural intake. According to traditional epistemology, we must begin with what is most certain: namely knowledge of our own sensations and thoughts. As the next step, we progress linearly to knowledge of an objective external world, and then to knowledge of other minds as the final step. This kind of epistemology can be titled as linear epistemology.

Traditional empiricist theories such as Berkeley's idealism in A New Theory of Vision (1709), Carnap's logical empiricism in Der logische Aufbau der Welt (1928), even Quine's naturalized epistemology in From Stimulus to Science (1995), are typical forms of linear epistemology. This post intended to indicate predicaments of this linear epistemology, and then to anticipate the importance of the second person as another epistemological basis or ax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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