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아 Οὐσία: 가장 아름다운 인간

페미니스트 예수

예수아이디어 : 2007/04/22 16:57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그렇게 많은 일들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제일 좋은 것을 택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그녀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Martha,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so many things, but only one thing is necessary. Mary has chosen what is bes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누가복음 10:41-42.

먼저 읽어야 할 글: 예수도 마초?

A. 먼저 병든 여자 이야기: 예수 당대의 전통에 의하면, 그것이 생리든 질병이든, 여자의 하혈은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여자의 하혈이 여자를 부정하게 취급하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남자들은 여자의 육체적 고통 위에 정신적 모욕까지 얹어 주었다. 당대의 로마 사상가 플리니우스는 그의 책에서 하혈증을 앓은 한 여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런 상태의 여인이 가까이 오면 발효 전의 과즙은 시어지고, 정원의 나무는 시들고, 이 여인이 올라갔던 나무의 열매는 떨어진다. 청동이나 심지어 쇠까지도 곧 녹이 슬며 공기에서도 불쾌한 냄새가 난다.” 이것은 당시의 “과학”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과학은 당시 사회에서 부인병에 걸린 여인들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이런 고통을 12년 동안 겪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진다. 참혹하고 모욕적인 자기 병을 낫게 하고 싶은 강한 바람 때문이다. 예수는 이것을 감지하고, 짐짓 이 여인에게 화를 내는 듯하다.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이 경우 예수는 옷을 빨아서 부정한 기운을 없애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은 예수를 더럽혔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옷자락을 만진 사람을 무리 중에서 색출하려 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그 여인에게 저주를 퍼붓기 위해 그 여인을 색출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그 지식인은 예수의 이 축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는 그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그가 하혈증을 앓는 여자라 하더라도, 그의 구원을 원한다. 예수는 그 여인이 처한 불행한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옷자락을 허락 없이 만진 그 수치스러운 여인에게서 어떤 불결함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존엄성을 보았다.

예수는 존엄성을 향한 그녀의 의지, 그녀의 생명력을 칭찬한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거라”(마가5:34). 무엇에 관한 믿음인가? 자신도 신적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어딘가에 신적 은총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예수는 그녀가 자기에게 해방과 구원, 안심과 건강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겼다.

그 여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채 예수를 만난 셈이다. 그녀는 예수가 당대 문화와 지식과 관례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녀는 남성들에 의해 전수되고 강화되었던 인습적 전통에 대한 내면적 저항을 신적 은총에 대한 추구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당대의 지식인과 윤리학자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병든 여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예수는 남자들은 물론, 남자들에 의해 억압받는 여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는 데 자기 사역을 집중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러한 활동들이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와 동일시했다. 예수의 이 정신은 어떤 자유사상이나 계몽주의, 또는 그 어떤 과학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인습적 전통에 항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억압적 요소들을 언제나 초월했기 때문이다.


The Calvary. Nikolay Gay의 1893년 미완작푬. 모스크바 The Tretyakov Gallery 소장.

B. 그 다음 건강한 여자 이야기: 마르다는 아무런 질병을 앓지 않고 있다. 그녀는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예수를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여성의 임무’에 충실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은 제쳐두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르다는 왜 예수께서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는지 묻는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버릇없이 남자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리아를 칭찬한다. 예수는 ‘여성의 임무’에 충실히 했던 마르다에게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부드럽게 나무란다.

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제일 좋은 것을 택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그녀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을 보다 명확하게 바꾸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진실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모든 것 중에 최선의 것,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그 하나를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아서는 아니 된다.”

진정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예수와 함께] 인간의 원형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그 하나를 즐기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사람도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가 여자라 하더라도 그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신학과 철학, 신앙과 과학에 대해 대화하고 탐구하고 성찰하는 것을 분수에 넘친다고 놀려서는 아니 된다.

예수는 단순히 남자를 돕거나 가사를 돌보는 정숙한 여인이 되는 것이 여자 본연의 임무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도 사람인 한, 가장 중요한 것, 구원과 은총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이고, 그것은 신적 은총이기 때문에, 해방은 여성들에게도 열려 있고, 남자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추구했던 진정한 여성해방이다.



C. 마지막 동네 여자 이야기: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비스듬히 기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동네여자’가 예수의 등 뒤에 와서 그에게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다(누가7:37). 그녀가 죄인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창녀인 듯하다. 그녀는 율법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춘 뒤 향유를 발랐다.

이 때 원리주의자 시몬은 예수와 접촉하고 있는 저 여인이 추악하고 불결하다는 것을 예수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속으로 조롱한다. 그러나 경악스럽게도 예수는 경건하고 의롭고 윤리적인 시몬보다 죄 많은 이 여인이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해 주었다고 말한다(누가7:47).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로 자임하는 예수가 의인 남자보다 죄인 여자가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예수는 이 여자에게서 불결과 죄악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이 여자는 사랑이 죄와 율법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거룩한지 부정한지가 아니라, 그에게 깃든 사랑과 신적 은총이다. 만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이며,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만난 것이며, 이미 해방된 존재이다. 제2차수정 0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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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2 16:57 2007/04/2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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