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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시아 Οὐσία: 가장 아름다운 인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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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인간의 본질에 대한 오랜 성찰</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13 Oct 2008 00:15: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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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우시아 Οὐσία: 가장 아름다운 인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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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페미니스트 예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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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align=justify&gt;&lt;FONT face=Garamond&gt;
&lt;DIV style=&quot;BORDER-LEFT-COLOR: #cc9900; BORDER-BOTTOM-COLOR: #cc9900; BORDER-TOP-STYLE: dotted; BORDER-TOP-COLOR: #cc9900; BORDER-RIGHT-STYLE: dotted; BORDER-LEFT-STYLE: dotted; BACKGROUND-COLOR: white; BORDER-RIGHT-COLOR: #cc9900; BORDER-BOTTOM-STYLE: dotted&quot;&gt;&lt;FONT color=#d41a01&gt;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그렇게 많은 일들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제일 좋은 것을 택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그녀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I&gt;Martha,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so many things, but only one thing is necessary. Mary has chosen what is bes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lt;/I&gt;&lt;/SPAN&gt; 누가복음 10:41-42.&lt;/DIV&gt;&lt;br /&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8e8e8e&gt;먼저 읽어야 할 글: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23&quot;&gt;예수도 마초?&lt;/a&gt;&lt;/FONT&gt;&lt;br /&gt;&lt;br /&gt;&lt;FONT face=Garamond&gt;&lt;FONT color=#333333&gt;A. 먼저 병든 여자 이야기: 예수 당대의 전통에 의하면, 그것이 생리든 질병이든, 여자의 하혈은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여자의 하혈이 여자를 부정하게 취급하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남자들은 여자의 육체적 고통 위에 정신적 모욕까지 얹어 주었다. 당대의 로마 사상가 플리니우스는 그의 책에서 하혈증을 앓은 한 여인을 이렇게 묘사했다. &lt;br /&gt;&lt;br /&gt;&lt;FONT color=#008000&gt;“이런 상태의 여인이 가까이 오면 발효 전의 과즙은 시어지고, 정원의 나무는 시들고, 이 여인이 올라갔던 나무의 열매는 떨어진다. 청동이나 심지어 쇠까지도 곧 녹이 슬며 공기에서도 불쾌한 냄새가 난다.” &lt;/FONT&gt;이것은 당시의 “과학”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과학은 당시 사회에서 부인병에 걸린 여인들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lt;br /&gt;&lt;br /&gt;마가복음 5장에는 이런 고통을 12년 동안 겪고 있는 여인이 등장한다. 이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을 몰래 만진다. 참혹하고 모욕적인 자기 병을 낫게 하고 싶은 강한 바람 때문이다. 예수는 이것을 감지하고, 짐짓 이 여인에게 화를 내는 듯하다. 레위기 15장에 의하면, 이 경우 예수는 옷을 빨아서 부정한 기운을 없애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여인은 예수를 더럽혔다. &lt;br /&gt;&lt;br /&gt;그래서 예수는 자기 옷자락을 만진 사람을 무리 중에서 색출하려 한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는 그 여인에게 저주를 퍼붓기 위해 그 여인을 색출해 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그 지식인은 예수의 이 축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lt;br /&gt;&lt;br /&gt;예수는 그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상관없이, 심지어 그가 하혈증을 앓는 여자라 하더라도, 그의 구원을 원한다. 예수는 그 여인이 처한 불행한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옷자락을 허락 없이 만진 그 수치스러운 여인에게서 어떤 불결함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존엄성을 보았다. &lt;br /&gt;&lt;br /&gt;&lt;FONT color=#666699&gt;예수는 존엄성을 향한 그녀의 의지, 그녀의 생명력을 칭찬한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거라”(마가5:34). 무엇에 관한 믿음인가? 자신도 신적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어딘가에 신적 은총이 실재한다는 믿음이다. 예수는 그녀가 자기에게 해방과 구원, 안심과 건강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귀하게 여겼다. &lt;br /&gt;&lt;br /&gt;그 여인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채 예수를 만난 셈이다. 그녀는 예수가 당대 문화와 지식과 관례의 관점에서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그녀는 남성들에 의해 전수되고 강화되었던 인습적 전통에 대한 내면적 저항을 신적 은총에 대한 추구로 승화시켰던 것이다.&lt;br /&gt;&lt;br /&gt;당대의 지식인과 윤리학자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병든 여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예수는 남자들은 물론, 남자들에 의해 억압받는 여자들의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치유하는 데 자기 사역을 집중했다. 예수는 자신의 이러한 활동들이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와 동일시했다. 예수의 이 정신은 어떤 자유사상이나 계몽주의, 또는 그 어떤 과학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인습적 전통에 항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억압적 요소들을 언제나 초월했기 때문이다. &lt;/FONT&gt;&lt;br /&gt;&lt;br /&gt;&lt;div class=&quot;imageblock center&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clear: both;&quot;&gt;&lt;img src=&quot;http://nownhere.com/attach/16/894777.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13&quot; /&gt;&lt;/div&gt;
&lt;CENTER&gt;&lt;FONT color=#8e8e8e&gt;The Calvary. Nikolay Gay의 1893년 미완작푬. 모스크바 The Tretyakov Gallery 소장.&lt;/FONT&gt; &lt;/CENTER&gt;&lt;br /&gt;
&lt;P align=justify&gt;B. 그 다음 건강한 여자 이야기: 마르다는 아무런 질병을 앓지 않고 있다. 그녀는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예수를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여성의 임무’에 충실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일은 제쳐두고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르다는 왜 예수께서 마리아를 나무라지 않는지 묻는다. 그러나 예수는 오히려 버릇없이 남자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마리아를 칭찬한다. 예수는 ‘여성의 임무’에 충실히 했던 마르다에게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고 부드럽게 나무란다. &lt;br /&gt;&lt;br /&gt;그리고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제일 좋은 것을 택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그녀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을 보다 명확하게 바꾸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진실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모든 것 중에 최선의 것, 가장 중요한 것, 바로 그 하나를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마리아에게서 빼앗아서는 아니 된다.” &lt;br /&gt;&lt;br /&gt;&lt;FONT color=#666699&gt;진정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예수와 함께] 인간의 원형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그 하나를 즐기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사람도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비록 그가 여자라 하더라도 그는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그것은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단순히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신학과 철학, 신앙과 과학에 대해 대화하고 탐구하고 성찰하는 것을 분수에 넘친다고 놀려서는 아니 된다.&lt;br /&gt;&lt;br /&gt;예수는 단순히 남자를 돕거나 가사를 돌보는 정숙한 여인이 되는 것이 여자 본연의 임무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여자도 사람인 한, 가장 중요한 것, 구원과 은총에 대해 사유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이고, 그것은 신적 은총이기 때문에, 해방은 여성들에게도 열려 있고, 남자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예수께서 추구했던 진정한 여성해방이다.&lt;/FONT&gt;&lt;br /&gt;&lt;br /&gt;&lt;br /&gt;C. 마지막 동네 여자 이야기: 시몬이라 하는 바리새인이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예수가 그의 집에서 비스듬히 기대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동네여자’가 예수의 등 뒤에 와서 그에게 향유를 바르는 것이었다(누가7:37). 그녀가 죄인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창녀인 듯하다. 그녀는 율법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춘 뒤 향유를 발랐다. &lt;br /&gt;&lt;br /&gt;이 때 원리주의자 시몬은 예수와 접촉하고 있는 저 여인이 추악하고 불결하다는 것을 예수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속으로 조롱한다. 그러나 경악스럽게도 예수는 경건하고 의롭고 윤리적인 시몬보다 죄 많은 이 여인이 자기를 더 많이 사랑해 주었다고 말한다(누가7:47).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로 자임하는 예수가 의인 남자보다 죄인 여자가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lt;br /&gt;&lt;br /&gt;&lt;FONT color=#666699&gt;예수는 이 여자에게서 불결과 죄악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랑을 보았다. 그리고 이 여자는 사랑이 죄와 율법보다 강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거룩한지 부정한지가 아니라, 그에게 깃든 사랑과 신적 은총이다. 만일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이며,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는 하나님의 만난 것이며, 이미 해방된 존재이다.&lt;/FONT&gt; &lt;FONT color=#c1c1c1&gt;제2차수정 050312&lt;/FONT&gt;&lt;/P&gt;&lt;/FONT&gt;&lt;/FONT&gt;&lt;/FONT&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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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22 Apr 2007 16:57: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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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갑바도기아 지하 동굴 속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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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파닥거리는 생선 같았던 진경 자매의 발제, 솔직하고 생생한 선아의 질문, 이슈를 정리하는 용진 형제의 탁월함, 날카롭고 시니컬한 승일 형제의 비판, 열정적인 보선 형제의 호기심. 그러나 모두들 지나치게 진지했던 것 같아요. 묘한 긴장이 있어요. 이런 지성적 긴장을 즐길 수 있는 청년모임은 알게 된 것이 행운입니다. 이런 것을 저 자신도 매우 즐기는 편이지만, 몇 프로 부족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아요. 용서할 일을 별로 겪지 않았고, 오히려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 많았는데, 타인에게 용서의 당위성을 요구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용서하기 힘든 구체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다면 토론과 적용이 더 쉽지 않았나 생각해요. 무엇이 진정한 용서인지는 상황에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실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개념 규정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각자가 부닥친 상황이 전제되지 않으면, 용서의 적용은 탁상공론에 불과해 보입니다.&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중앙선을 침범해서 제 두 가족의 생명을 앗아간 사람, 음주운전을 했고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어요. 법적 처리 대상이라서 그랬는지 몰라요. 감옥에서 오래 살기를 바라지도 않았어요. 아마 2년은 넘지 않고 출소했을 겁니다.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그러나. 무슨 소설이죠? 자기 아이를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지 못하다가 몇 년간 마음 고생 끝에 그를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 어머니. 그러나 그 범인은 환한 미소를 띠면서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머니는 자기 용서를 철회합니다. 자기는 오랫동안 그토록 분노와 억제로 가슴이 아팠는데 오히려 그는 마음이 편했다니! 용서는 정말 무엇일까요?&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과거사를 청산하는 국가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둡니다. 이때 진실이 용서와 화해의 전제 조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용서한다고 해서 진실을 덮어 둘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용서는 무엇일까요?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알게 하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가요? 이 점에서 그의 허물을 무작정 덮어두는 용서는 정말 무책임한 것 같아요.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교회 내에서도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치리를 행사합니다. 한국교회는 치리가 없기로 유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사람을 용서하는 데 아주 익숙합니다. 교회 재정을 함부로 써도 용서합니다. (반면 사소한 교리의 차이를 묵인하지 않고 치리하는 것은 자주 있습니다.) 신사참배한 거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은 서로 서로 용서했습니다.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용서는 그것이 사랑인 한 진정한 용서가 됩니다. 사랑은 진리를 포함합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쁘게 여기고 허위를 싫어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 받는 이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이가 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예수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공개재판하는 대신 그녀가 은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새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랑은 부처의 넓은 자비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신적 통치가 행해지는 어떤 강력한 힘입니다. 예수는 율법주의가 불가촉천민과 여인과 아이와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그 율법주의의 한 축을 형성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붕괴시켜야 했습니다. 동전 두 개를 헌금하는 가난한 여인을 사랑했던 예수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예루살렘 성전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해체해야 했습니다. 예수의 사랑은 통치행위였고, 성전 정화는 그 행위의 일부였습니다. 죄인들과 몸을 기대고 식사하는 그 도발적 행동과 같은 맥락입니다.&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용서는 예수를 통해 실천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한 양식입니다. 용서는 타자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무시나 무지를 함축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용서는 은혜의 확대를 막는 요소들을 제거해 가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시적 차원에서 용서를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제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운 용서는 말하자면 &quot;배신&quot; 같은 것입니다. 거짓말, 기만, 신뢰를 저버림, 이용함 등. 특히 엄청난 신뢰를 보냈던 사람이 거짓말하거나 배신했을 때, 그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증오, 불타는 질투 등이 용서를 가로 막습니다. 세계대전이 세계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지만, 감정의 불화도 개인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용서는 타자, 사람, 감정에 대한 무시나 무지를 전제해서는 안 됩니다. 타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오히려 용서를 돕고 바른 용서의 조건입니다. &lt;/font&gt;&lt;/p&gt;&lt;p&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갑자기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은신처였던 갑바도기아 동굴 속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일을 장악하는 힘이 현저해 약해진 느낌입니다. 손에 힘을 풀고 일들을 놓고 싶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그 동굴은 아주 희미한 불빛이 있을 것이고, 아주 고요한 울림이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할 수 있고 누구라도 그리울 것입니다.&lt;/font&gt;&lt;/p&gt;&lt;p&gt;&lt;img alt=&quot;&quot;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06/0825/03506332_20060825.JPG&quot; border=&quot;0&quot;/&gt;&lt;/p&gt;&lt;p&gt;카파도키아 데린쿠유 지하도시. ① 입구, ② 막힌 입구, ③ 수로, ④ 통풍구, ⑤ 교회, ⑥ 돌문. 출처: 인터넷 한겨레.&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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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9 Aug 2006 11:30:3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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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한승 선생께: 하나님나라는 우리 손닿은 만할 곳에 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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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ont color=&quot;#666699&quot;&gt;&lt;font color=&quot;#c1c1c1&quot;&gt;[내일부터 저는 외부세계와 단절된 곳으로 갑니다. 친구들 그동안 잘 있길 바랍니다. 아래 글은 사랑하는 김한승 선생께 읽어드리기 위해 9년 전에 쓴 글을 고쳐 썼습니다. 원래 글은 94년으로 거슬러갑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읽고 수정한 글인 셈입니다. ㅋㅋ]]&lt;/font&gt;&lt;br /&gt;
&lt;br /&gt;
&lt;br /&gt;
&lt;font size=&quot;3&quot;&gt;&lt;strong&gt;하나님나라는 우리 손닿은 만할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그곳에 닿을 수 있다.&lt;br /&gt;
&lt;/strong&gt;&lt;/font&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 background-color: #ffdaed&quot;&gt;&lt;font color=&quot;#d41a01&quot;&gt;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메타 파라테레세오스] 오지 않는다. 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엔토스 휘몬] 있다. 누가복음 17:20~21.&lt;/font&gt; &lt;br /&gt;
&lt;/div&gt;&lt;br /&gt;
&lt;br /&gt;
&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어떤 해석자는 “파라테레세오스”가 규칙과 계명의 “지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이 하나님나라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 땅에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말씀이다. 즉 이 물음은 제의역법상의 어떤 시간을 묻는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유월절의 날짜를 결정하기 위해 늘 하늘을 관찰했다. &lt;br /&gt;
&lt;br /&gt;
이 말씀은 &lt;font color=&quot;#666699&quot;&gt;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지켜봄” 또는 “관찰”을 통해 확인될 수 없음&lt;/font&gt;을 주장하고 있다. &lt;font color=&quot;#666699&quot;&gt;그 나라의 도래는 유월절 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종류의 시간 계산에 의해서 인지될 수 없다. 그 나라는 합리적 추론이나 경험적 관찰을 통해 그 도래를 예측할 수 없다.&lt;/font&gt;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시간 개념에 지배받지 않는다. &lt;br /&gt;
&lt;br /&gt;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그리고&lt;font color=&quot;#666699&quot;&gt; 하나님나라는 특정한 지점에 안착하는 방식으로 도래하는 하는 것도 아니다&lt;/font&gt;.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식으로는 그 나라의 나타남의 장소에 대해 언제나 올바르게 말할 수 없다. 묵시적 시간표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건설되는 장소 또한 우리에게 알려 질 수 없다. 그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공간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lt;br /&gt;
&lt;br /&gt;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예수께서는 하나님나라 도래의 통상적 시간예측이나 장소추측을 반대하면서, 그 나라의 도래에 관한 매우 놀랄 만한 주장을 한다.&lt;font color=&quot;#d41a01&quot;&gt; 하나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lt;/font&gt; 그 나라의 나타남의 때와 장소에 관한 그 어떤 종류의 물리학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실패한다는 부정적 진술은 이 긍정적 진술에 의해 완성된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뜻한다. 물론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청중들 즉 우리들을 뜻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 &lt;br /&gt;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그렇다면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말인가? 이 해석은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그 나라가 관찰될 수 있는 방식으로 도래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가 우리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해석이 옳다면 하나님나라는 단지 사람들의 내적 체험의 차원에 있을 뿐이다. 사실 이런 해석은 그 유래가 매우 깊다. 특히 영지주의 문헌에서 이런 해석은 매우 전형적이다.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659에는 다음과 같은 언설이 등장한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으며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누구나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lt;br /&gt;
&lt;br /&gt;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도마복음서 어록 3에도 비슷한 구절이 등장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하나님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볼 것이요, 그들이 너희에게 ‘그것이 바다에 있다’고 한다면, 물고기가 너희보다 먼저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그것은 너희 없이 존재한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안다면, 너희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아들들임을 너희가 알 것이고 알려질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나라를 발견한다! 자기를 아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영지주의적 해석이 예수의 다른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4세기의 한 신학자는 “너희 안에”(엔토스 휘몬)을 “너희의 선택 범위 안에”로 해석했다. 그리하여&lt;font color=&quot;#d41a01&quot;&gt; 하나님나라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안에”에 놓여 있다&lt;/font&gt;. 그리하고 한 현대 신약신학자는 1세기말부터 3세기말까지의 파피루스 사본들에 대한 문헌학적 조사를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이들은 방대한 그리스 문헌들에서 그 단어에 대한 용례를 검토함으로써, 이 해석의 타당성을 더욱 높혔다. 이 해석은 예수의 다른 말씀들과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언어학자들의 반대도 없다. &lt;br /&gt;
&lt;br /&gt;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우리의 손닿을 만한 곳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나라는 실제로 지금 우리 손닿을 만한 곳에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있게 도래하지 않는다. &lt;font color=&quot;#008000&quot;&gt;그 나라는 알 수 없는 먼 미래에 실현되는 어떤 것으로서 장래에 도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접근할 수 없는 저 밖에 있는 어떤 것으로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지금 와있다&lt;/font&gt;. &lt;/font&gt;&lt;p&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나타남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lt;font color=&quot;#ff0000&quot;&gt;하나님나라가 언제, 어디에, 나타날 것인지 알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하나님나라는 너희의 도달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알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그 복을 얻는 것은 너희의 능력 안에 놓여 있다. &lt;br /&gt;
&lt;/font&gt;&lt;br /&gt;
&lt;font color=&quot;#99cc66&quot;&gt;&lt;strong&gt;하나님나라는 예수와 말과 행위 속에서, 그리고 그 말과 행위를 통하여 현재에 들어왔고, 그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가능성은 복음을 듣는 우리 모두의 범위 안에 놓여 있다. 그 나라의 도래에 관한 묵시적 탐구는 우리 해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활동을 통해 가까이 온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감지하고 그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미래의 소망이 아니다.&lt;/strong&gt;&lt;/font&gt; &lt;/font&gt;&lt;font color=&quot;#009966&quot;&gt;&lt;strong&gt;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소망과 비전을 실현하는 길은 지금 내 삶이 하나님의 해방적 통치 행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lt;/strong&gt;&lt;/font&gt; &lt;font color=&quot;#c1c1c1&quot;&gt;19971027. 수정 060701. &lt;/font&gt;&lt;/p&gt;&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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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01 Jul 2006 13:24: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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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현재의 임무: 은총을 유지하는 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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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color=&quot;#FF0000&quot;&gt;이야기 속으로&lt;/font&gt;&lt;br /&gt;
&lt;font color=&quot;#666699&quot;&gt;&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208&quot;  target=&quot;_blank&quot;&gt;예수의 이 비유&lt;/a&gt;에서 주인공은 경영자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 말씀의 청자들에게 이 경영자의 태도에 주목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청자들은 그 경영자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염두에 둔 캐릭터임을 직감하게 된다. 나는 이제 그 경영자의 모습으로 이야기 속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 경영자는 현실 속에 나 자신으로 출현한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무한한 은총&lt;/font&gt;&lt;br /&gt;
그 경영자처럼 나는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 이것은 기독교적 전제이다. 당신은 이 전제를 거부할 수 있다. 예수는 이 전제를 현재에 관한 기본적 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이 기독교적 전제를 거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단순한 가정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즉 만일 내가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면.... 예수의 신학적 추론은 얼마나 타당할까?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 예수의 신학적 전제를 일단 수용하기로 하자.&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채권자로서 나&lt;/font&gt;&lt;br /&gt;
나는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 그리고 이 은총을 입은 시점은 현재이다. 따라서 내가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는 것은 나의 현재를 기술하는 기본적 사실이다. 이제 나는 친구를 만난다. 이 만남은 현재 벌어지는 일이다. 그 친구는 나에게 채무가 있고, 나는 채권자로서 타자 앞에 서 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현재 나의 자유로운 선택&lt;/font&gt;&lt;br /&gt;
친구는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현재에 친구를 용서할 수도 아니 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그는 용서하지 않기로 지금 선택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자 나의 자유이다. 이것은 현재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한편 전통적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내 모든 행위들은 심판 받을 것이다. 그 심판은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종말보다 현재를 더 자주 말씀하신다. 예수에게 현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현재로서 종말&lt;/font&gt;&lt;br /&gt;
나는 내 행위에 앞서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 먼저 은총이 있었고 그 다음에 내 자유로운 행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특징이다. 내 행위가 먼저 있고 그 행위에 대해 은총이 입혀진 것이 아니다. 나는 내 행위에 관계없이 무한한 은총을 입었다. 은총 이전의 행위는 우리 이야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lt;br /&gt;
&lt;br /&gt;
나는 은총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가지고 있다. 내 행위는 내 은총을 위태롭게 한다. 내 행위는 나에게 입혀진 은총을 무효로 만들었다. 이것이 현재가 가지는 종말적 성격이다. 종말은 시간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종말은 현재이다. 이 현재에 나는 은총의 지배를 받느냐, 그것을 거부하냐를 결정한다. 은총은 과거의 내 행위가 아니라 현재 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현재의 임무: 은총을 유지하는 것&lt;/font&gt;&lt;br /&gt;
현재의 행위는 나에게 입혀진 은총이 미래까지 유효하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현재의 하나님나라는 나에게 무한한 은총으로 나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은총을 위협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없다. 현재의 내 임무는 미래의 심판을 기다리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무한히 입혀진 은총을 유지하는 것이다.&lt;br /&gt;
&lt;br /&gt;
[계속]&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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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2 Mar 2006 21:09: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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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가 세헤라자데를 능가하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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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color=&quot;#666699&quot;&gt;아라비안나이트에나 나오는 굉장한 과장이 예수의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자비롭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째 과장. 한 경영자가 국가에 빚을 졌는데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그 채무액은 자그마치 만 달란트나 되는 액수이다. 금 한 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이백오십 년 동안 꼬박 일하여 모은 액수에 해당된다. 채무자가 이 빚을 갚을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만 달란트라는 액수는 그 자체로 무한대의 빚을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이라는 숫자는 예수 시대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숫자이고 “달란트”는 그 당시에 가장 큰 통화단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가장 큰 숫자와 가장 큰 통화단위를 결합함으로써 그 채무액이 거의 무한대이며 채무를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lt;br /&gt;
&lt;br /&gt;
둘째 과장. 빚쟁이 경영자는 임금에게 갚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말한다. 얼마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도저히 그 경영자가 만 달란트를 마련할 수 없다는 사정을 감안한다면 경영자의 말은 그야말로 과장 그 자체이다. 심지어 만 달란트의 이자는 매달 수백 달란트에 이를 것이다. 대략 한 사람의 경영자가 일 년에 다루는 금액이 수 달란트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매달 수백 달란트 그래서 연간 수천 달란트를 벌어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경영자는 임금에게 말한다.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lt;br /&gt;
&lt;br /&gt;
셋째 과장. 그 국가의 통치자는 아무런 요구 없이 그 채무를 탕감한다.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통치자가 그 경영자에게 무한한 은혜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관대함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통치자는 그 경영자가 채무를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lt;br /&gt;
&lt;br /&gt;
넷째 과장. 채무를 변제 받은 이후 그 경영자의 태도는 이 모든 과장들의 절정이다. 경영자는 빚을 탕감 받고 난 그 길로 바로 친구를 찾아가 멱살을 잡고 자기의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한다. 이 경영자에게 빚을 진 사람은 게다가 자기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 빚의 규모는 자기가 빚진 것의 겨우 오백만 분의 일밖에 되지 않았다. 친구가 빚진 금액은 충분히 변제 가능한 액수이다. 그래서 친구는 말미를 달라고 애원한다. 그 애원은 경영자가 통치자에게 했던 말과 똑같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그러나 그 경영자는 친구의 요청을 묵살했다. 무한한 은총을 입은 자가 이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 경영자의 완악함을 이해할 수 없다. 경영자는 통치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진노를 그의 무한한 자비 때문에 모면했다. 그러나 자비를 입은 바로 그 경영자는 최고 통치자의 진노를 자신의 친구에게 쏟아 부었다. 그는 비정하게도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다.&lt;br /&gt;
&lt;br /&gt;
그 다음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 사실은 최고 통치자의 귀에 들어갔고 당연하게 그의 은총은 무효가 되었다. 이것은 매우 지당한 일이다. 예수는 이 당연한 처사를 이야기 끝에 놓음으로써 이야기 전반부를 현실의 문제로 가져온다. 이 당연한 결말은 처음 이야기를 진지하게 만든다. 전반부의 이야기는 이제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는 과장 이상의 무엇이 된다. 그렇다면 너무나 당연한 결말은 이야기의 전반부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는가? &lt;/font&gt;&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ff0000&quot;&gt;[계속]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209&quot;  target=&quot;_blank&quot;&gt;현재의 임무: 은총을 유지하는 것&lt;/a&gt;&lt;/font&gt;&lt;/p&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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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예수아이디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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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09 Feb 2006 09:31: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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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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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C9900;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666699&quot;&gt;하늘에 계신 우리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아버지&lt;/font&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아버지&lt;/font&gt;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아버지&lt;/font&gt;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아버지&lt;/font&gt;의 것입니다. 아멘. &lt;font face=&quot;Garamond&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t;&quot;&gt;&lt;i&gt;&lt;/i&gt;&lt;/span&gt;&lt;font color=&quot;#8E8E8E&quot;&gt;KNCC 주기도문 사도신경 연구특별위원회&lt;/font&gt;&lt;/font&gt;&lt;/div&gt;&lt;br /&gt;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새로운 주기도문 번역에 대해 여성주의자들의 비판이 거세다 한다. 이 비판은 오래 전부터 제기되었다. 지난 5월 이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에서는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녀들은 그리고 그들은 &quot;하나님 상을 &#039;아버지&#039;로 국한한 호칭이 시대에 부합하지 않다&quot;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quot;보편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상을 주기도 속에 담아야 한다&quot;는 것이다. 그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lt;br /&gt;
 &lt;br /&gt;
&lt;p style=&quot;margin-left:10mm;&quot;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color=&quot;#008000&quot;&gt;&quot;주기도 새번역안&quot;의 하나님 상은 가부장적 이미지인 ‘아버지’로 문자적으로만 번역함으로써, 하나님 존재의 무한성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양성평등 시대를 지향하는 현대사회에 비춰볼 때, &#039;아버지&#039; 표현은 시대 문화적 흐름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기독여성들은 새롭게 번역될 경우, &quot;주기도&quot;속의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무한하신 하나님 상으로 표현되기를 오래 전부터 요청해왔다. 따라서 ‘아버지’ 칭호가 당대에 포괄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담을 수 있고, 탈가부장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도록 &#039;아버지&#039; 칭호문제는 빠른 시일 내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lt;/font&gt;&lt;br /&gt;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이처럼 그녀들은 &quot;아버지&quot; 대신에 &quot;하나님&quot;을 사용하기를 강력하게 희망한다. 그러나 나는 이 입장에 대해 크게 반대한다. 그것은 내가 &quot;아버지&quot;라는 용어에 가부장적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그녀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 용어가 하나님의 무한성을 제한할 수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주기도에 가부장적 흔적을 최대한 제거해야 하는 데 내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내가 이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quot;아버지&quot;, 보다 정확히 말해 &quot;아빠&quot;라 부른 것은, 그리고 나아가 아이나 어른이나, 남자나 여자나, 이방인이나 유색인이나, 노예나 귀족이나, 병든 자나 장애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quot;아빠&quot;라 부르도록 한 것은 예수의 가장 큰 발명이자 발견이기 때문이다.&lt;/font&gt; 예수께서 &quot;아빠&quot;라는 호칭을 도입했을 때 그는 가부장적 도그마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에 대해 &lt;a href=&quot;http://gyuhang.net/archives/2005/05/16@05:19PM.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규항&lt;/a&gt;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lt;br /&gt;
&lt;br /&gt;
&lt;p style=&quot;margin-left:10mm;&quot;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color=&quot;#008000&quot;&gt;예수는 하느님을 “압바”라고 부르곤 했다. ‘압바’는 우리말로 ‘아빠’다. 자, 가만히 눈을 감고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떠올리며 ‘아빠..’ 하고 불러보자. 어린 아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무한히 기댈 수 있는 어떤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드는가?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감성이 파탄 난 것이니 삶을 되돌아보길..ㅎㅎ)  ‘아빠’는 어린아이의 말이다. 어린 아이는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말은 남자 여자를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 (주입된) 다음에 사용하기 시작하는 말이다. 어린 아이에게 ‘아빠’란 ‘남성’이 아니며 권위적인 존재도 아니다. 어린 아이에게 ‘아빠’란 ‘무한히 기댈 수 있는 품’이다. 예수에게 하느님은 그런 존재였다. 주기도문은 그런 뜻을 잘 드러내야 한다.&lt;/font&gt; &lt;br /&gt;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늘날에는 &quot;아버지&quot;라는 용어에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주기도에서 &quot;아버지&quot;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quot;아빠&quot;를 사용할 수 없다면, &quot;아버지&quot; 대신에 &quot;하느님&quot;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입장은 여성주의 신학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나는 이에 대해 또한 반대한다.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왜냐하면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의 의도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lt;/font&gt;&lt;br /&gt;
&lt;br /&gt;
&lt;a href=&quot;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5/005000000200505140935001.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겨레&lt;/a&gt;는 주기도의 새 번역문에 대해 누리꾼과 전문가의 의견들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누리꾼들은 여성주의자들이 성경을 왜곡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한겨레는 한편 &quot;아버지&quot;라는 칭호가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quot;아버지&quot;의 대안으로서 그들은 &quot;하나님&quot;이나 &quot;하느님&quot;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대안이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quot;하나님&quot;이라 부르는 것과 &quot;신이시여&quot;라고 말하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대안은 하나님을 &quot;아버지&quot;라고 부른 예수의 의도와 의미와 맥락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 &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666699&quot;&gt;그렇다면 나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만일 &quot;아버지&quot;라는 호칭이 거북하다면, 그 대신에 그를 또는 그녀를 &quot;어머니&quot;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허용이 예수께서 의도했던 &quot;아빠&quot;의 도입 취지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다. &lt;b&gt;예수는 야훼를 정의와 거룩의 이름으로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수탈하는 지엄하신 제왕이 아니라 자궁처럼 포근하고 안락하고 따뜻한 어머니, 자기를 힘껏 들어올려 안아주시는 든든한 아버지로 묘사하기를 희망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lt;/b&gt;&lt;br /&gt;
&lt;br /&gt;
신학적으로 말해 하나님은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quot;아버지&quot;라고 부를 수도 (그녀를) &quot;어머니&quot;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은 &quot;아버지&quot;, 내일은 &quot;어머니&quot;라고 부른다 해도 오히려 하나님은 이것은 매우 귀하게 들어주실 것이다. 닭살이 돋지 않는다면 &quot;아빠&quot;나 &quot;엄마&quot;를 사용해도 좋다. 오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어떤가?&lt;/font&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C9900;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D41A01&quot;&gt;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해졌으면 좋겠고 어머니의 나라가 여기에 왔으면 좋겠고, 어머니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루 먹을 것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모든 나쁜 일에서 구해주십시오. 어머니는 영원히 세상을 다스릴 것이고, 우리를 구원할 힘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존재들로부터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이십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lt;/div&gt;&lt;br /&gt;
&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background-color:#F0F0F0;&quot;&gt;&lt;center&gt;&lt;font color=&quot;#9B18C1&quot;&gt;다른 예수아이디어들&lt;/font&gt;&lt;/center&gt;&lt;br /&gt;
&lt;font color=&quot;#008000&quot;&gt;A. 그 나라&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30&quot;&gt;하나님나라는 천당이 아니다&lt;/a&gt;.&lt;br /&gt;
2.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1&quot;&gt;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펼치는 강하고 은혜로운 손길이다&lt;/a&gt;.&lt;br /&gt;
&lt;br /&gt;
B. 예수운동의 동역학&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99&quot;&gt;하나님나라는 겸손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세상을 온통 변화시킬 것이다&lt;/a&gt;.&lt;br /&gt;
2.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11&quot;&gt;하나님나라는 지금 발견되고 그 발견은 인습적 관점에서 설계된 우리 미래를 전복한다&lt;/a&gt;.&lt;br /&gt;
&lt;br /&gt;
C. 정치적 예수: 여성, 사회적 연대, 국가&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23&quot;&gt;예수도 마초&lt;/a&gt;?&lt;br /&gt;
2.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25&quot;&gt;페미니스트 예수&lt;/a&gt;&lt;br /&gt;
3.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85&quot;&gt;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lt;/a&gt; &lt;font color=&quot;#8E8E8E&quot;&gt;[위 글]&lt;/font&gt;&lt;br /&gt;
4.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04&quot;&gt;하나님은 우리의 연대를 희망한다&lt;/a&gt;.&lt;br /&gt;
5.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6&quot;&gt;예수, 국가보안법 위반자&lt;/a&gt;&lt;br /&gt;
&lt;br /&gt;
D. Jesusology: 예수는 진정 누구인가?&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75&quot;&gt;예수는 전인류와 연대해 있다&lt;/a&gt;.&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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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예수아이디어</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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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2 Sep 2005 10:26: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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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예수는 전인류와 연대해 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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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C9900;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D41A01&quot;&gt;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lt;font face=&quot;Garamond&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t;&quot;&gt;&lt;i&gt;&lt;/i&gt;&lt;/span&gt;  마태복음 25장 40절; 45절.&lt;/font&gt;&lt;/div&gt;&lt;br /&gt;
&lt;font color=&quot;#C1C1C1&quot;&gt;* 주의: 미완의 글이라 가독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언젠가 윤문하여 업그레이드할게요. &lt;br /&gt;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font color=&quot;#333333&quot;&gt;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난감한 질문은 무엇일까? 그것은 &lt;font color=&quot;#666699&quot;&gt;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많은데, 하필이면 예수를 믿는 사람만 구원받느냐&lt;/font&gt;는 질문일 것이다. 이 질문은 아마도 신학과 종교학에서 가장 난해한 질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통상적 답변은 예수의 가르침에 근접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성찰하고자 하는 예수의 말씀은 왜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lt;br /&gt;
&lt;br /&gt;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46절은 최후의 심판을 비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가장 주목할 구절은 &quot;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quot;라는 예수의 놀라운 말씀이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자와 &quot;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quot;의 관계를 따져보는 것으로 그 의미를 탐구하기로 하자.&lt;br /&gt;
&lt;br /&gt;
먼저 &quot;지극히 작은 자&quot;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다. 첫째 의견: 그들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지극히 작은 자들, 즉 우리 속에 거하는 어린이, 고아, 과부, 노인,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갇힌 자들, 슬픈 자들을 의미한다. 이 의견은 예수의 말씀을 지나치게, 그리고 부당하게 제한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lt;br /&gt;
&lt;br /&gt;
둘째 의견: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순례자 및 성직자,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선교사 및 전도자들, 그리스도인 일반을 가리킨다. 이 견해는 세상사람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해석이다. 이 견해는 특히 마10:42와 막9:41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quot;이 전체 단락은 교회의 초기 시대에 신앙의 순회 전도자들을 호의적으로 영접하고 후하게 대접할 것을 호소하는 형태인 듯하다&quot;(Sharman). 그러나 이 해석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인자의 사역을 축소하는 것이고, 예수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편협한 사고방식을 부추길 뿐이다. &lt;br /&gt;
&lt;br /&gt;
일찍이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라고 하셨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라고 하셨으며, 병든 자와 강도 만난 자를 동정하라고 하셨으며, 아이와 고아를 돌보라고 말씀하셨고, 갚을 수 없는 자에게 값없이 빌려 주라고 했으며(눅6:34),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하면,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마5:16) 명령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윤리적 율법을 제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예수는 율법의 준수라는 기준 위에서 심판이 행해진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lt;br /&gt;
&lt;br /&gt;
예수는 &quot;율법의 더 중한 것&quot;(마23:23), 즉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를 가르쳤다. 그것은 사랑 또는 자비(인)이다. 예수는 율법에서 사랑을 추출해 냄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신다. 그의 행위와 말씀, 그의 삶과 죽음은 &quot;율법의 끝마침&quot;(롬10:4)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quot;사랑이 율법의 완성&quot;(롬13:10)이라는 진리를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증명했다.&lt;br /&gt;
&lt;br /&gt;
예수의 모든 행위들은 사랑을 실현하고 구현하고 있다. 본문에서 인자는 모든 인류들 각자에게 바로 이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사랑은 &quot;인자의 길&quot; 즉 &quot;사람의 길&quot;이다. &lt;font color=&quot;#666699&quot;&gt;비유에서 심판 받는 이들은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느냐 드리지 않느냐에 따라 심판 받지 않는다. 예수를 알든 모르든, 그들 모두는 인자(사람)의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에 따라 심판 받는다. &lt;/font&gt;사람의 길 즉 사랑의 길에는 어떠한 종교적 교리도, 특별한 형이상학적 전제도 없이, 다만 자기 삶의 반경 내의 행위들만 언급되고 있다. 본문이 마10:42와 막 9:41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lt;br /&gt;
&lt;br /&gt;
염두에 둘 것은 본문에서 최후의 심판이 전인류를 포괄하는 심판이라는 점이다. 인자 앞에 소집된 자들은 모든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전체 인류이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자국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심지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한 인류 전체이다. 최후의 심판에서 지극히 작은, 인류의 개개 성원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 행위들이 예수에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지극히 작은, 인류의 개개 성원들에게 보인 사랑과 긍휼의 행위들은 예수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된다. &lt;br /&gt;
&lt;br /&gt;
사랑하지 않는 자는 &quot;인자의 길&quot;, &quot;사람의 길&quot;을 걷지 않는 것이고, 인자의 길을 걷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도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 이 원칙은 전 인류에게 적용된다. 이 장면은 야고보서 2장 12절과 13절의 말씀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quot;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quot;&lt;br /&gt;
&lt;br /&gt;
이제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 속에 담긴 중요한 의미를 이해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윤리적 명령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려는 의도로 선포된 것이 아니다. 이 심판의 자리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예수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말씀은, 인자 예수는 모든 곳 모든 때의 인류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가 어디서 살았건 어느 때 살았건 상관없이, 이 세상에 살았던 누구와도 관련을 맺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우리가 언제 태어났던, 어느 시절에 살았건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와 관계를 맺고 있다. &lt;br /&gt;
&lt;br /&gt;
이 구절만큼 예수의 편재성과 보편성을 아름답게 표현한 곳은 없을 것이다. (반면 그의 편재성과 보편성에 대한 통상적 기술은 얼마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가!) 물론 &quot;예수 = 소자&quot;라는 단순한 등식으로 예수를 사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하여 예수운동을 한갓 윤리적 운동이나 사회주의적 민중운동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전인류와 이러한 장대한 스케일의 연합은 그 어떤 다른 사상에서도, 그 어떤 종교나 문화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lt;br /&gt;
&lt;br /&gt;
예수께서는 자기를 &quot;인자&quot;라고 표현한다. 이 본문은 왜 당신께서 자신을 &quot;인자&quot;라고 칭했는지를 매우 잘 드러내고 있다.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인자라는 칭호에는 기독교 신학의 가장 핵심적 비밀이 담겨 있다. 그것은 예수와 사람들 사이의 동일화이다. 그 동일화는 그가 죄인들과 함께 했던 식탁 교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동일화의 절정은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었다. 예수와 인류 사이의 바로 이 연대는 종말까지 계속되고 급기야 최후에 심판에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lt;/font&gt; 예수는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전인류와 연대하는 존재로서 자기 역할을 극적으로 그리고 선명하게 보여 준다.&lt;br /&gt;
&lt;br /&gt;
이제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만이 구원을 받는가, 라는 애초의 질문에 대한 보다 합당한 답변에 점점 근접하고 있다. 우리가 참사람이 되는 길은, 신학적으로 말해, 오직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한편 기독교는 예수가 하나님과 인류들을 연결시켜 주는 메타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온인류와 연대하는 존재여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어야 하는 신학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는 이러한 예수와 연대하는 것이 곧 사람의 올바른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lt;br /&gt;
&lt;br /&gt;
본문을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가 전인류와 연대해 있다는 사실이 더욱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사실은 나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지극히 공적인 사건에 해당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lt;font color=&quot;#666699&quot;&gt;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낱 개인적 삶의 스타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공적인 사람, 전 인류의 삶에 동참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지극히 보편적인 사람, 전형적인 사람, 범례적인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만이 참사람이며, 참사람이 사는 인자의 나라에 살 수 있다.&lt;/font&gt;&lt;br /&gt;
&lt;br /&gt;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이 참 사람이 걸어가야 할 것임을 믿는다.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그가 통치하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잊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는 전인류와 연대해 있다!&lt;br /&gt;
&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9B18C1&quot;&gt;----------------------------------&lt;/font&gt;&lt;br /&gt;
&lt;font color=&quot;#8E8E8E&quot;&gt;더 많은 예수아이디어를 알고 싶다면 아래 글을 읽어 보세요.&lt;/font&gt;&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008000&quot;&gt;A. 그 나라&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30&quot;&gt;하나님나라는 천당이 아니다&lt;/a&gt;.&lt;br /&gt;
2.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1&quot;&gt;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펼치는 강하고 은혜로운 손길이다&lt;/a&gt;.&lt;br /&gt;
&lt;br /&gt;
B. 예수운동의 동역학&lt;br /&gt;
1.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99&quot;&gt;하나님나라는 겸손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세상을 온통 변화시킬 것이다&lt;/a&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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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6&quot;&gt;예수, 국가보안법 위반자&lt;/a&gt;&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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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Jesusology: 예수는 진정 누구인가?&lt;br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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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5 Aug 2005 16:00:0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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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라, 복음, 미래, 순수, 계급, 포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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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ont color=&quot;#333333&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p align=&quot;justify&quot;&gt;아침님의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에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적어 주신 글(아래)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더욱 크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50&quot;  target=&quot;_blank&quot;&gt;왜 일부 주류 기독교인들은 국보법을 사수하려 하는가?&lt;/a&gt; 에 대한 아침의 반론에 대한 저의 재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나라:&lt;/font&gt; &quot;하나님나라&quot;에서 &quot;나라&quot;를 &quot;통치 활동&quot;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일반화된 것입니다. &quot;나라&quot; 또는 &quot;국가&quot;의 3대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예수께서 &quot;하나님나라&quot;를 언급할 때 나라의 요소들 중에서 &quot;주권&quot;의 의미가 제일 강합니다. (고전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quot;왕권&quot;kingdom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quot;나라가 임하옵시며&quot;라고 할 때 이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복음:&lt;/font&gt;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들이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그 소식이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quot;복음&quot;입니다. 다시 말해 &lt;b&gt;복음이란 요한계시록의 새예루살렘성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께서 개시했던 바로 그 하나님나라에 관한 소식입니다&lt;/b&gt;. &lt;font color=&quot;#666699&quot;&gt;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행위들을 통해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는(구원하는) 그 은혜로운 방식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lt;/font&gt; 제 글,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6&quot;  target=&quot;_blank&quot;&gt;예수, 국가보안법 위반자&lt;/a&gt;의 논지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방식과 국보법의 방식은 매우 상반된다는 것입니다. 아침님께서도 이것을 인정하시라 믿습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미래: &lt;/font&gt;저는 제 자신의 이상에 부합하는 하나님나라의 몇 가지 측면만을 주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다른 측면들 중에서 제 주장과 상반되는 것이 있다고 아직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을 자상하게 지적해 주시면 저에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나라의 초월적(?) 미래적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측면이 현세적 현재적 측면의 의미와 중요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안 되겠지만요. &lt;br /&gt;
&lt;br /&gt;
하나님나라의 미래적 측면이 저의 주장을 논박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lt;b&gt;오히려 하나님나라의 미래적 측면은 국보법의 방식을 완전히 거부할 것입니다.&lt;/b&gt; &lt;font color=&quot;#666699&quot;&gt;새예루살렘에서는 생명나무의 나뭇잎들이 민족들을 치료합니다(요한계시록 22:2). 거기서는 민족들이 서로 반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습니다.&lt;/font&gt; 요한계시록 21장 3절과 4절에 묘사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보십시오. 국보법의 기술과 얼마나 다릅니까!&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순수성:&lt;/font&gt; 신앙의 순수성이란 세속적 가치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물한 그 나라 시민권의 가치를 생각할 때, 저는 국보법을 주저없이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런 생각이 신앙의 순수성을 해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그리스도인들은 노예 해방에 앞장섰고, 로마의 뿌리를 흔든다는 이유로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노예 해방을 실천했던 그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기 때문입니까? 히틀러 치하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quot;총통은 주님이다&quot;는 혁대를 두르는 것에 반대했고, 일제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입니까?&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석의:&lt;/font&gt; 제 글에서 저의 주장들은 주로 다음 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래 책들은 비교적 건강한 석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lt;font color=&quot;#8E8E8E&quot;&gt;(i) G. R. Beasley-Murray, &lt;i&gt;Jesus and the Kingdom of God&lt;/i&gt;,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ii) G. E. Ladd, &lt;i&gt;The Presence of The Future&lt;/i&gt;,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lt;/font&gt;정확한 석의에 비추어볼 때, 물론 제 주장들 중에서 매우 잘못된 주장이 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어떤 것이 그런 주장인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 지적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계급:&lt;/font&gt; 아침님의 문제 의식은 이해합니다만 그것이 제 주장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계급적 편파성을 지닌 채 예수의 말씀을 오독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부자, 고위관료, 학자 등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득권자를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마도 계급투쟁을 선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급적 차별을 예수께서는 반대하셨습니다. 예수의 말씀이 기쁜 소식이 되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들에 누가 더 많이 근심(불안)했는지는 아침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포용: &lt;/font&gt;저는 모든 체체와 사상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체제를 가진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시는 분들을 보고 악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두고 사기꾼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을 제가 악하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들과 대화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성과 사랑을 가지고.&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탈북자: &lt;/font&gt;저도 보수진영에서 북한주민을 돕는 데 앞장섰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역할이 컸습니다. (민간부분의 80%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그 역할이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지금처럼 국보법 폐지 반대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앞의 태도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탈북자도 도와야 하지만, 북한 전역에서 고통받고 있는 우리 동포들도 도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돕는 것이 효과적입니까? 긴장을 완화하고, 교류를 확대하고, 직접적 인도적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만원, 이만원을 직접 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국가로 하여금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지원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입니다. 내내 평안하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옥시스 드림.&lt;/font&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1C1C1;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999966&quot;&gt;&lt;b&gt;하나님나라에 대한 다른 이해.&lt;/b&gt; 지면으로 하는 대화는 역시 조금 한계가 있구나 하는 느낌도 있지만, 오가는 대화를 통해서 옥시스의 생각을 조금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면 쉽게 공감하는 공감대가 있다고 여기는 편인데 때때로 이 공감대라는 것이 서로 어디까지냐 하는 부분도 명확히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먼저는 자꾸만 논의를 확대할 것이 아니라 옥시스가 주장한 하나님나라와 제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점 등을 서술하면 좀 더 논지의 차이가 드러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lt;br /&gt;
&lt;br /&gt;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6&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래의 글&lt;/a&gt;을 보죠. 맥락은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김정란 교수는 교회 내의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보수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예수를 이용해 정치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오히려 예수는 기득권자들의 음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들어 비유적으로 예수는 국가보안법의 희생자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옥시스는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주요 이슈를 끌어들여 하나님의 통치의 여러 가지 양상과 세상 나라의 통치를 대비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이미지 즉 기득권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보호하고 약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이미지를 활용하여 성경의 기득권자는 광장의 보수기독교 지도자들로, 약자는 국보법의 희생자들로 대비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성경 이해와 적용의 문제점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서 말씀드리죠. &lt;br /&gt;
&lt;br /&gt;
첫째,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는 개념에서 핵심은 ‘나라’나 ‘통치하심’의 양태에 있지 습니다. 옥시스께서는 원래의 기사에서 “누가복음에 따르면, 지금 가난한 자는 지금 하나님나라에 살고 있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복음이라 칭하면서, 세속적 통치 방식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lt;br /&gt;
&lt;br /&gt;
또 다르게는 “예수는 반국가단체를 만들고 그것의 활동 방식을 복음이라 부르고 있었다”라고도 하며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요.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통치하심”의 핵심 개념이 “하나님”보다는 “통치방식”이 “복음”이라는 방식으로 복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lt;br /&gt;
&lt;br /&gt;
천국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선언은 그 선언하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구속사적인 맥락을 떼어서는 성립될 수 없는 전제입니다. 동시에 “하나님나라”라는 개념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의미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통치 방식”이 “복음”이라는 주장은 성경에서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표현입니다.&lt;br /&gt;
&lt;br /&gt;
즉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므로 그 통치방식이 아름다운 것인데 옥시스는 특정한 통치방식-이성적으로 보았을 때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통치방식-이 복음이라는 주장함으로써 옥시스의 글에서 사용된 복음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 복음”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것으로 여겨지게 만듭니다. &lt;br /&gt;
&lt;br /&gt;
어쩌면 비슷한 것을 꼬투리 잡기 위해 따지는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옥시스의 글 대부분에서 진정한 가치의 부여나 평가가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상에 부합하는 하나님나라의 몇가지 측면-주로 현세의 정치적 측면-에 한정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는 당연히 현재적인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초월적 미래적 측면이 있습니다.&lt;br /&gt;
&lt;br /&gt;
제가 초월을 강조해서 하나님나라를 멀리 보내려한다고 하셨는데 하나님나라의 오심을 기도하는 것이 이 땅의 특정한 법안의 개폐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여기지 않을 뿐입니다. 김정란 교수나 옥시스의 글에 대한 저의 느낌은 신앙의 순수성이 훼손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외람되지만 국보법 폐지에 예수님의 이름까지 거는 과감함이 제게는 국보법 유지에 올인하는 보수 기독교인의 어리석음보다 그리 지혜롭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만을 취사 선택해서 그것만을 복음시하는 것은 건강한 성경 이해가 아닙니다. &lt;br /&gt;
&lt;br /&gt;
실상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는 조건이 있어 기득권이 없는 가난한 자가 기득권자보다 더 쉽게 복음을 받아 들이고 반대로 기득권자(부자)는 천국의 조건(기득권의 포기)을 통과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지 내용적으로 복음이 기득권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의미는 아니거든요. 김정란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성경의 문맥을 무시한 채 자신의 정치적 취향대로 복음과 예수가 기득권자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뉘앙스를 충분히 살리면서 왜곡을 한 것이죠.&lt;br /&gt;
&lt;br /&gt;
둘째, 김정란 교수와 옥시스의 성경이해에서 느껴지는 문제점과 위험성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위의 첫째 문제제기와 관련이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성경은 건강한 석의과정(성경말씀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과정)을 거친 후에 해석(현재에 대한 적용)을 하는 것이 필수적이죠. 그런데 옥시스의 글에서는 정확한 석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이성에 따라 성경을 파악하고 해석한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lt;br /&gt;
&lt;br /&gt;
옥시스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하나님나라의 오심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하나님나라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양태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지만, 정작 핵심적 요소인 하나님 당신의 존재 자체가 무시되지 않았는지요? 약자에 개방적이고 기득권자에 적대적인 패턴을 복음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lt;br /&gt;
&lt;br /&gt;
건강한 석의과정 없이 성경 속의 다양한 패턴들을 자신의 이성대로만 해석한다면 예수님과 복음은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공산주의자 예수, 이슬람교도 예수, 동성애자 예수, 자본주의자 예수 등. 성경이 지적하는 내용과 맥락에서 성경의 문자를 분리해 버린다면 예수와 복음이 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기호에 맞는 예수의 모습만을 따와서 자신의 핍박받는 처지를 투사시켜 버리면 되니 말입니다.&lt;br /&gt;
&lt;br /&gt;
셋째, 하나님나라와 복음을 상당히 계급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의 위험성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복음과 하나님나라는 모든 이를 향해 그 문이 열려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나라와 통치에서는 그것이 장애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가난한 마음일 수 있으니 가진 것이 많은 자보다 더욱 축복일수 있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였던 사람들 중에는 기득권자들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인 약자들이 많았던 데서도 그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lt;br /&gt;
&lt;br /&gt;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예수님과 복음이 가난한 이와 기득권자들에 대해서 편파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김정란 교수가 마치 기득권자들만의 모함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왜곡한 빌라도 법정의 모습에 대해 성경은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누가복음23:13)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로써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예수와 복음을 거절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lt;br /&gt;
&lt;br /&gt;
여기까지가 두 분의 성경이해에 대한 저의 문제제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옥시스께서 언급하신 “적”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옥시스는 “우리가 포용해야 할 사람들의 사회”라는 표현으로써,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적 개념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이라면 그 포용과 사랑의 대상에 이 “적”이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lt;br /&gt;
&lt;br /&gt;
보수적인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면, 그 “적”은 옥시스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포용하고 사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입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것과 그 체제와 사상을 포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르지 않나하는 생각입니다. 어떠한 정치 체제가 다른 정치 체제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사랑과 포용이라는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여 선악의 문제로 판단한다는 것이 제대로 된 사용인지 의문스럽습니다.&lt;br /&gt;
 &lt;br /&gt;
용서와 사랑은 인격간의 관계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지 비인격적인 존재인 정치 체제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부문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 있어 위안부를 동원하는 데 관여한 일본인을 용서하는 것은 충분히 덕스럽고 권장할 만 합니다. 그러나 위안부를 동원했던 일본의 정치 체제를 용서하는 것이 덕스럽게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잘못된 사용이 아닙니까?&lt;br /&gt;
 &lt;br /&gt;
보안법 폐지에 반대하시는 분들의 논리에 반대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 쪽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께는 이렇게 충고해 드리고 싶습니다. 멀리 있는 원수 사랑하자고 하지 말고 가까운 원수나 사랑하시라고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조크입니다. 용서나 사랑 같은 용어를 정치 체제와 사상간의 영역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시는 듯 해서 하나의 문구로 그 부적절함을 지적한 정도로 여겨주시길. ^^;)&lt;br /&gt;
&lt;br /&gt;
개인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저 자신의 취향보다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에 더 귀기울이고 살려고 애쓴다고 생각합니다. 보수진영이 북한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일수도 있답니다. &lt;br /&gt;
&lt;br /&gt;
탈북자문제에서처럼 그런 어려운 북한주민을 돕자고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이는 보수진영이지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북한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말하는 진보진영에서는 이런 실질적인 북한주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문 채 북한정부에 대해서 포용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면이 있더군요. 어차피 모든 정치 논리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선악이라기보다는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집중할 것이냐의 문제지요. 선한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정치이슈에서 선악을 논한 두 분의 글이 조금 오버라고 생각하는 주요 이유입니다.&lt;br /&gt;
&lt;br /&gt;
아참,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미국에 의지하는 보수주의자들, 그냥 기득권이니 뭐니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면 됩니다. 그들이 어떤 영에 의해서 휘둘리는지 스스로 깊이 자문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6.25 같은 참화를 겪으면서 험악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저렇게 되었겠구나. 선한 롯도 악한 마을에 살다 보니 양심이 상했다는데, 하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답니다.&lt;br /&gt;
&lt;br /&gt;
쓸데없는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만하죠. 옥시스가 뭐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시는 일 잘 되시길 빕니다. 저는 장사로 돈 많이 버는 한 주가... 하하.. 평안하세요.. *^L^*&lt;/div&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1C1C1;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999966&quot;&gt;&lt;b&gt;옥시스의 글에 깊이 동감합니다.&lt;/b&gt; 아침의 지적에 대한 반론도 잘 읽었습니다. 그 분이 오해할 수 있는 지점이 이해는 되지만 또한 옥시스의 답변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리라 믿습니다. &lt;br /&gt;
&lt;br /&gt;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직 &#039;대속&#039;의 죽음으로&#039;만&#039;(대속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직 &#039;저 세상&#039;의 것으로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게 속세를 초월한 듯 말하면서 사실상은 경제성장제일주의에 젖어서 사회적 약자들의 저항을 정죄하는 게 오늘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복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열려진 &#039;하나님의 나라&#039;에 참여하는 복음이 외쳐질 때가 아닐런지요. &lt;br /&gt;
&lt;br /&gt;
추신: 사실 옥시스의 글은 신학적으로 오히려 보수적인 쪽에 속하는 글인데 민중신학 비스무레하게 오해를 받는 것을 보니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김강기명.&lt;/font&gt;&lt;/div&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1C1C1;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999966&quot;&gt;&lt;b&gt;성실하신 답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lt;/b&gt;답변을 통해 건강한 신학적 스탠스와 하나님나라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적인 전제에서 진보적인 결론이 나오는 과정을 보고 있자니 어떤 점에선 엘룰이 생각나는군요. 학생시절 그의 글을 읽고 흥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lt;br /&gt;
&lt;br /&gt;
어떤 점에서 제가 오해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상 김정란 교수의 글은 합리적인 크리스찬이라면 충분히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글이었지만 건강한 성경적 전제로부터의 도출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비약이 존재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비유적 표현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내신 것 같습니다. &lt;br /&gt;
&lt;br /&gt;
그렇지만 옥시스께서 답변으로 주신 성경적인 전제들은 옥시스의 전제일 뿐 김정란 교수의 전제는 아닌 듯 합니다. 옥시스께서 김정란 교수의 글에 찬성하신다고 하셨을 때 제가 김정란 교수의 신학적인 스탠스를 옥시스의 스탠스와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였답니다. 아무튼 저의 이런 착각은 저의 게으름 때문임을 인정하며 사과드립니다. &lt;br /&gt;
&lt;br /&gt;
개인적으로 국보법폐지에 공감하는 마음은 옥시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50&quot;  target=&quot;_blank&quot;&gt;지난 글&lt;/a&gt;에서 인용한 바울의 권고처럼 이러한 정치적인 주제로 교회가 나누어지는 작금의 상황이 보다 우려스러워 보안법 논쟁에서 일방적인 선언보다는 대화가 필요하고 다른 선택이 가능한 주제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lt;br /&gt;
&lt;br /&gt;
추신: 래드... 옥시스의 글에서 래드를 발견하고는 어찌나 우스웠던지요. 아닌게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한 옥시스의 글을 읽고는 저녁에 집에 와서 곰팡이내 나는 래드의 책을 집어들었더랬습니다. 래드, 리델보스, 엘룰, 쉐퍼... 정치적인 이슈로 뒤덮혔던 대학생 때 하나님나라,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주제에 심취한 사람이 어디 저 하나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렇게 가슴 뛰게 천착하던 주제의 책들이 요즘은 창고화된 서재(? ^^;)에서 곰팡이내를 피우는 처지가 되버렸더군요.. -.-;&lt;br /&gt;
&lt;br /&gt;
11시가 넘어서야 가게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래드의 책을 꺼내드니 아내가 왜 안하던 짓을 하냐고 그냥 애들 자게 빨리 불이나 끄라고. 그냥 조용히 내려 놓고 가연이 배 위에 손을 얹고서 토닥거리며 같이 잤습니다. 내일은 졸부 손님들이 와서 돈벼락을 맞으리라 소망하면서 말이죠. 하하. 다음에 또 인사드릴게요. *^L^* 아침.&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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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7 May 2005 23:53: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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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하나님나라는 우리 안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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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1C1C1;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999966&quot;&gt;&lt;b&gt;예수를 파는 사람들:  &lt;/b&gt;별볼일 없는 자신의 세속적 입장을 변론하기 위해 별짓을 다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quot;써먹는&quot; 이런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펴는 것이야 정치적으로 얼마든지 이 땅에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재단하고 섯불리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국보위 개폐는 나름대로 논리를 펴서 자기 주장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제발 거기서 끝나길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길 바란다. 중늙은이.&lt;/div&gt;&lt;br /&gt;
&lt;font color=&quot;#333333&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p align=&quot;justify&quot;&gt;저도 중늙은이님처럼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써먹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그런 사람들 많이 보게 됩니다. &lt;font color=&quot;#666699&quot;&gt;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와 말씀을, 선과 자유와 해방을 신장하는 곳에 활용하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lt;/font&gt; 저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제 의도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선의를 너그럽게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lt;br /&gt;
&lt;br /&gt;
저는 하나님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lt;font color=&quot;#D41A01&quot;&gt;하나님나라는 우리 손 닿을 만한 곳에서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활동은 국가보안법의 방식과 전혀 다릅니다.&lt;/font&gt; 이것이 제 주장의 논지입니다. 옥시스 드림.&lt;/font&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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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26 May 2005 14:26: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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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왜 일부 주류 기독교인들은 국보법을 사수하려 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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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font color=&quot;#333333&quot;&gt;&lt;font face=&quot;Century Gothic&quot;&gt;&lt;p align=&quot;justify&quot;&gt;&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8&quot;  target=&quot;_blank&quot;&gt;예수는 가장 아름다운 현실주의자&lt;/a&gt;에 대한 반론(아래)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적어주신 성경말씀 고맙게 받겠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그와 함께 많은 질문과 의견을 주셨습니다. 게으르고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하나 하나 답하지 못해 유감입니다. 그냥 제 생각을 짧게 밝히겠습니다. &lt;br /&gt;
&lt;br /&gt;
&lt;div class=&quot;imageblock right&quot;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mg src=&quot;http://nownhere.com/attach/16/837609.gif&quot; height=&quot;508&quot; width=&quot;300&quot; /&gt;&lt;/div&gt;오해의 소지를 준 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침님의 해석적 게으름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제가 &quot;적&quot;을 언급한 것은 국가보안법과 연관해서입니다. 국보법 논쟁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국보법 논쟁에서 &quot;적&quot;이란 바로 북한을 의미합니다. 국보법은 우리가 북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국보법의 이러한 방식을 반대하실 것입니다. 북한은 우리가 포용해야 할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저에게 적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조금의 성의만 있었다면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에서 바로 그 원수입니다. &lt;br /&gt;
&lt;br /&gt;
저는 제가 자기중심적 성경해석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중심으로 성경해석을 하려고 여태 노력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모든 성경해석과 기독교적 실천의 프로토콜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하자면 예수 근본주의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정의보다 사랑을, 응징보다는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아침님은 몽학선생(아이를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돕는 사람, 갈라디아 3:24)과 같은 구약의 율법으로 예수의 말씀의 제한하고 계시지는 않은가요?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적에게는 응징을, 우리편에게는 사랑을, 이런 식의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의 국가론을 이야기할 때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lt;font color=&quot;#8E8E8E&quot;&gt;[오른쪽은 Titian의 &quot;Christ Crowned with Thorns&quot;(1540). 파리의 루브르 소장.]&lt;/font&gt; &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003366&quot;&gt;범우주적 정의는 최후의 하나님께서 실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하나님나라는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사랑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에 심판이 섞여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복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현재에는 사랑의 복음이, 최후에는 영원한 정의가!&lt;/font&gt; &lt;br /&gt;
&lt;br /&gt;
아침님은 &quot;초월적인 하나님나라&quot;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quot;초월적인&quot;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오기를 늘 기도합니다. &lt;b&gt;그러나 &quot;초월&quot;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종종 하나님나라를 저 멀리로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lt;/b&gt; &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D41A01&quot;&gt;예수께서는 형이상학적 수탈을 가하는 사변적 신학(교리)과 종교권력을 전복하십니다. 권력화되고 산업화된 기독교는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통치(하나님나라)를 세속적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위선적이게도 하나님의 통치를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 간주하거나, 가장 악랄하게도 자신의 권력과 행위들을 하나님의 통치와 동일시합니다. 주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왜곡된 기독교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앞장서나 부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국보법 사수와 숭미는 그런 활동들의 한 실천입니다. &lt;/font&gt; 그리고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400&amp;no=223928&amp;rel_no=1&amp;index=1&quot;  target=&quot;_blank&quot;&gt;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이런 경향&lt;/a&gt;은 경악을 금치 못할 일입니다.&lt;br /&gt;
&lt;br /&gt;
권력화되고 산업화된 기독교에 대한 저의 이런 비판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비판이 타당하다면, 국보법 문제가 단순한 선택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매우 노골적으로 말해 &lt;b&gt;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의 국보법 사수의 동기는 국민(인민)의 안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역대 권위주의적 정권과 결탁해서 형성한 세속적 지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국보법을 사수하고 있습니다.&lt;/b&gt;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회학적 판단이 예수가 국보법을 반대할 것이라는 제 추정의 직접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lt;/font&gt;&lt;br /&gt;
&lt;br /&gt;
&lt;div style=&quot;padding:10; background-color:white; border-width:2; border-color:#C1C1C1; border-style:dotted;&quot;&gt;&lt;font color=&quot;#999966&quot;&gt;&lt;b&gt;국보법은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lt;/b&gt; &lt;a href=&quot;http://nownhere.com/oxys/index.php?pl=148&quot;&gt;지난 글&lt;/a&gt;을 쓸 때 제가 조금 급하게 적느라 논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 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역시 제가 옥시스의 반론을 읽고 나니 과연 제 논지가 불명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오해를 풀고 제 논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적어 보겠습니다. &lt;br /&gt;
&lt;p align=&quot;justify&quot;&gt;첫째, 옥시스는 예수님께서 국보법을 반대하셨을 거라 추정하면서 그 이유로 “그가 당대의 국가 개념에 완전히 반하는 국가론을 펼쳤다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전개는 아마도 기존의 국가가 인권침해적 독소조항을 동원해서 국가를 보호하는 그런 식의 국가론과 예수님의 국가론이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른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대략 이해하였습니다. 당연히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국가의 통치방식은 극도로 다릅니다. &lt;br /&gt;
&lt;br /&gt;
그렇지만 실상 초월적인 하나님나라를 세속적인 반국가적단체라고 보고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들이 미는 논리는, 비록 이것이 비유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지극한 자기중심적 성경 해석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정치꾼들이 무슨 일이건 자기네들 유리한 대로 갖다 붙이는 그런 뉘앙스랄까요. 옥시스의 원래 취지가 선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만, 성경말씀을 일부 정파의 이익에 종속하게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더군요. 제가 느끼기엔 김정란 교수나 옥시스의 주장은 예수님의 국가론보다는 열혈당원의 국가론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 또한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을 바꾸어서 하나님나라를 오게 만들겠다는 선한 양심의 사람들이었다고 생각되니까요.&lt;br /&gt;
&lt;br /&gt;
둘째,  옥시스는 적에게도 사랑을 펼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마치 어떠한 경우에라도 처벌이 없는 사랑만을 펼치신다는 주장으로 들립니다. 제가 오해는 했다면 그것은 옥시스의 부주의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반론에서는 제가 언급하지 않는 문구로 바꾸어서 마치 제가 발언한 것인 양 비판하시니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저는 옥시스의 글처럼 “적의를 보이는 타자를 응징하라”라는 전제를 옹호한 적이 없답니다. 단지 옥시스께서 말씀하신 “적에게도 사랑을 펼친다”는 전제는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고 한 것 뿐입니다. &lt;br /&gt;
&lt;br /&gt;
셋째, 한편으로는 옥시스의 논지에 공감하면서도 조금 우려스러운 바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옥시스는 “예수의 말씀이 구약을 ‘제한’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옳다고 보기 힙듭니다. “제한”이 아니라 “해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죄인인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하나님의 정의(심판)보다는 사랑(용서)이 더욱 아름답고 감사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정의를 압도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정의를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건강한 성경 이해가 아닙니다. &lt;br /&gt;
&lt;br /&gt;
사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별로 성경 지식이 많지도 않은 제가 교만하게도 옥시스의 성경 해석을 이렇게 꼬투리 잡을 그런 일은 아니었겠습니다. 다만 김정란교수나 옥시스께서 정치적 사안을 선악의 선택으로 비약을 시키는 글로 느껴져서 조금 깐깐하게 따져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저는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교회 내에서는 충분히 신실한 성도들 중에도 나름의 이유로 국보법 폐지에 반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소조항을 없애는 정도가 적절하다고 믿는 크리스천들은 옥시스의 글에 따르면 주님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정치적인 선택의 문제로 그 분들에게 이런 부담을 지우시는지요? &lt;br /&gt;
&lt;br /&gt;
지금 인권침해적인 독소조항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런 독소조항을 고치는 데 동의하고 있고 다만 완전히 폐지할 것인지 아니면 문제 부분을 없애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은지 입장이 달라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 이런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은 일체 무시해 버리고 예수님이라면 폐지쪽이었을 거라니요? 정치적인 사안을 이런식으로 선악의 문제로 비약시켜 버리면 그 다음부터 어떤 논의가 가능할는지 상상이 가시는지요? 누가 악의 편에 서야 되는지요? 결론적으로 저는 국보법 문제는 선한 양심에 따라 택할 선택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lt;br /&gt;
&lt;br /&gt;
자신의 양심에 따라 주장을 하고 글을 쓰면서도 무고한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이런 과격한 표현은 충분히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요즘은 자꾸만 자신들의 정치적 취향이나 이익들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이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자제하시길 부탁드리고 싶네요. 옥시스께서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성이 복음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냥 바울 선생의 글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아침 드림. [원문 수정]&lt;br /&gt;
&lt;br /&gt;
&lt;font color=&quot;#8E8E8E&quot;&gt;어떤 교우 아닌 사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 가거든 구태여 양심을 따지지 말고 차려 내 온 음식은 무엇이든지 잡수십시오. 그러나 누가 &quot;이것은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입니다&quot; 하고 일러 주거든 그 말을 한 사람과 그의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quot;왜 내 자유가 남의 양심 때문에 제약을 받아야 하느냐? 그리고 내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을 먹는데 감사를 드린 그 음식 때문에 내가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quot; 하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 여러분은 유다인에게나 그리이스인에게나 하느님의 교회에나 어느 누구에게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여 결국 그들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7-33. 공동번역.&lt;/font&gt;&lt;/font&gt;&lt;/div&gt;&lt;fieldset style=&quot;margin:20px 0px 20px 0px;padding:5px;&quot;&gt;&lt;legend&gt;&lt;span&gt;&lt;strong&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lt;/strong&gt;&lt;/span&gt;&lt;/legend&gt;&lt;!--Creative Commons License--&gt;&lt;div style=&quot;float: left; width: 88px; margin-top: 3px;&quot;&gt;&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lt;img alt=&quot;Creative Commons License&quot; style=&quot;border-width: 0&quot; src=&quot;http://i.creativecommons.org/l/by-nc-nd/2.0/kr/88x31.png&quot;/&gt;&lt;/a&gt;&lt;/div&gt;&lt;div style=&quot;margin-left: 92px; margin-top: 3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저작물은 &lt;a rel=&quot;license&quot; href=&quot;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nd/2.0/kr/&quot; target=_blank&gt;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라이센스&lt;/a&gt;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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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30 Apr 2005 14:23:3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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