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면 마루와 벼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두 고양이는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내 구두 소리라는 걸 안다. 그런데 벼루는 내 구두 소리가 단순히 귀청의 떨림이 아니라 저기 귀청 바깥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까? 붉은 형광펜으로 책에 줄을 그으면 마루가 달려온다. 펜을 따라가며 물어뜯어 줄이 비뚤어지기 일쑤다. 마루는 정말 형광펜 붉은 뚜껑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까?
마루는 꼬리와 노는 것을 즐긴다. 꼬리를 잡기 위해 맴돈다. 힘겹게 잡은 꼬리를 물어뜯는다. 꼬리는 바로 자신의 일부였다. 흔들리는 그 꼬리가 몸 바깥 사물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몸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도 놀라지 않는다. 꼬리를 핥는 것으로 마루의 꼬리잡기 놀이가 끝난다. 마루는 어디까지 자기 몸이고 어디서부터 자기 몸 바깥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벼루는 내가 자기 똥을 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아니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똥 눈 뒤엔 꼭 흙을 덮는다. 벼루는 흙이 실제로 없어도 흙 모으는 시늉을 한다. 일 년 내내 아니 죽을 때까지 흙 모으는 시늉을 멈추지 않는다. 시늉이 아니다. 자기 딴엔 정말로 흙을 모으고 있다. 벼루는 흙이라는 것이 자기 망막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벼루는 심지어 자기 몸 바깥에 똥이 실재한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마루는 자아와 비자아를 구별하지 못한다. 벼루와 마루는 다만 자신의 시각장, 청각장, 후각장에 포착되는 것에 단순히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기 몸에 새겨진 신경망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들에게 신경망은 곧 전기회로이다.
자동출입문 앞에 서자 문이 자동적으로 열린다. 이것이 나의 실재를 감지한 것일까? 아니다. 자동출입문은 자기 앞에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자기 앞에 어떤 물체라도 다가오면 열리도록 조작되어 있다. 허수아비를 가져다 놓아도 문은 열린다. 심지어 아무 물체가 없어도 자동출입문은 모종의 존재를 감지한 양 반응한다. 얼마의 빛만으로도 문은 열린다. 이 장치는 오직 장치 내 센서에 포착된 전자기파에 감응할 뿐이다. 그렇게 반응하도록 회로가 설계되어 있다.
자동출입문은 물체의 존재를 분간하지 못한다. 세계에 물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이 작동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센서를 자극시킬 전자기파만으로 충분하다. 적외선추적미사일은 적 전투기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전투기를 향해 돌진한다. 해바라기는 태양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태양을 향해 굽는다. 벼루는 흙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흙을 판다. 치타는 영양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양을 추격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어머니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젖을 빤다.
사람들은 사물의 실재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했다. 갑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물이 사실은 환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것이 대부분 거짓일지 모른다고 절망한다. 을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물은 대부분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것이 대부분 참일 것이라고 위로한다.
돌하르방, 괭이갈매기, 부용정, 갓바위, 흑산도, 토성, 안드로메다는 정말로 저기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잊을 만하면 회자된다. 영화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수학에서, 물리학에서 어렵지 않게 듣는다. 뻔히 존재하는 것들을 왜 존재하지 않는다고 애써 설득하려는 것일까?
우리는 전과를 가지고 있다.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 줄곧 밝혀졌다. 모두들 없다고 단정했던 것이 갑자기 발견되었다. 이 오류들 때문에 잘못된 길을 걸었고 다투었다. 오류는 우리를 욕망과 광기로 내몰고 위험에 빠뜨리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결국 사람은 오류를 혐오하고 보다 확실한 것을 찾는 습관을 훈육 받아야 했다. 확실성의 추구는 곧 생존 가치를 높이는 길이다.
이연이 나를 처음 보았을 때 경건 아니 비세속성을 발견했다. 탐욕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산에서 금방 내려온 소년처럼 천연덕스러웠다. 그는 나에게 지성과 아름다움을 보았다. 내가 이연을 보았을 때 유연 아니 여성성을 발견했다. 고색창연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는 집시처럼 외롭게 매혹적이었다. 나는 그에게 아름다움과 지성을 보았다.
이연이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이미지였다. 그것은 환영이었고 허상이었다. 헛된 열병을 앓았고 나에게 전염시켰다. 내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미덕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갓 이미지에 불과하고 환각이자 변덕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밝혀졌다. 그는 대가를 치렀다. 이미 쏟았던 열 개의 찬사를 거두어야 했고 아홉 개의 고백들을 철회해야 했다.
나에게 생긴 열병은 그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그는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자신의 변심을 정당화해야 했다.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아팠고 그녀를 괴롭혔다. 그는 생활의 위험을 느꼈다. 내가 더 난폭했더라면 그는 생존까지 위협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내가 죽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았을 수도 있다.
매혹, 정념, 정열, 열병, 집착, 망상, 상사, 광기, 죽음. 이것은 실제로 그러함과 그렇게 보임 사이의 간격이 만들어낸 악마들이다. 우리는 처음에 그 간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둘을 같게 만들고자 억지를 부린다. 그러나 그 어떤 억지와 폭력을 동원하더라도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이연은 깊이 성찰했다. 오류를 줄이고 싶었다. 확실성을 얻고 싶었다. 옛 스승들은 줄곧 가르쳤다. 바깥을 보지 말고 안을 보라. 그들은 가장 확실한 것이 안에 있다고 가르쳤다. 나 자신에 관한 것이 가장 확실하다. 그리하여 그는 안을 들여다봄으로써 확실성에 이르고자 하는 서클에 가입했다. 자기를 더욱 분명히 보기 위해 마음을 깨끗이 닦았다. 거울이 깨끗해야 비친 상들이 왜곡이 없다.
스승의 가르침엔 한계가 있다. 거울이 이제는 깨끗해졌다는 확신을 얻을 방법은 없었다. 마음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나는 단지 나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감지할 뿐이다. 나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언제나 실제로 그러함과 부합한다고 확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내가 확실성에 항상 머물게 될 날이 오리라는 희망은 헛된 꿈인지 모른다.
모두를 얻을 수 없다고 해서 모두를 잃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절대 확실성을 추구하는 길 대신 절대 오류를 피하는 길을 택했다. 오류를 피해 길을 걷다보면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서만 빛이 드러나고 거짓이 있는 곳에서만 참이 드러난다. 암흑의 공간 속에서 우리는 빛을 발견하며, 오류의 공간 속에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
오디세이의 출발점은 거짓의 공간, 오류의 공간을 감지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 바로 이 공간 속에서만 나는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바이메탈, 자동출입문, 적외선추적미사일, 해바라기, 고양이는 자기 반응들이 잘못된 반응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 그들의 반응은 물리적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프로세스의 산물이다. 물리법칙이 변덕을 부리지 않는 한, 시스템 결함으로 인한 기능 장애가 없는 한, 그들의 반응은 완벽하게 정상작동하기 마련이다.
내 반응, 내 생각, 내 말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음을 감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차이를 알아채는 것이다. 나는 추워 벌벌 떨고 있는데 다른 이는 더워 부채질을 하고 있다. 내 반응과 다른 반응 사이의 차이는 오류의 공간을 열어준다. 그러나 다만 두 반응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두 반응이 차이가 난다면, 주체는 반응의 차이에서 오류의 공간으로 이행하지 못한다. 나의 오한과 그 부채질이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른 반응이라는 점이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
홍시는 붉고 포도는 검다. 레몬은 시고 수박은 달다. 물은 축축하고 흙은 마르다. 이것들은 한 대상에 대한 다른 반응이 아니다. 두 대상에 대한 다른 반응일 뿐이다. 한 대상에 대한 다른 반응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알기 위해, 그리하여 반응의 차이를 감지하기 위해 나는 다른 주체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나 외에 다른 주체, 바로 타자의 존재를. 이 타자는 자주 나와 비슷하게 반응하고 가끔 나와 다르게 반응한다.
자아가 있기 전에 타자가 있었다. 한 핏덩어리가 자아로 성장하기 위해 그는 먼저 타자와 접촉해야 했다. 타자는 자아의 존재 기반이다. 타자는 자아와 영원히 다른 존재이다. 타자와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 자아는 사라진다. 완벽하게 같은 두 동전은 있을 수 있고 완벽하게 같은 두 고양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같은 두 자아는 있을 수 없다. 한 자아는 반드시 다른 자아와 다르다. 한 자아는 다른 자아에게 영원히 타자로 남는다. 타자는 영원히 자아 바깥에 존재한다. 타자는 자아의 인식 범위 안에 결코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타자는 인식의 검은 구멍이자 특이점이다.
자아와 타자의 차이는 제거할 수 없다. 바로 이 차이가 오류의 공간을 창출한다. 해바라기는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태양에 반응하는 해바라기가 있으리라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마루는 벼루를 똥과 흙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곤 하는 또 다른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마루에게 벼루는 똥과 흙처럼 자기 감각장 내에 어른거리는 현상에 불과하다. 갓난아기에게 어머니는 처음엔 단지 자신의 시각장과 후각장에 포착되는 현상일 뿐이다.
자아 바깥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타자 의식을 가져야 한다. 타자를 의식할 때 비로소 자아와 타자 사이의 공간을 인식하게 된다. 그 사이 공간은 자아의 바깥이며 바로 세계이다. 세계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공간에서 현현한다. 자아와 타자는 다만 그 세계를 다르게 표현할 뿐이다. 이 다름과 차이의 공간에서 거짓이 폭로되고 진리가 드러난다.
지성이란 차이의 공간을 넓혀 세계를 확장하는 활동이다. 거짓의 제국을 혁명하여 진리를 만연하게 하는 것이다. 광기란 공간을 장악하여 세계를 한 줌 자아 속으로 함몰시키는 것이다. 성숙이란 보다 분명하게 타자를 의식하여 차이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나와 동일성 속으로 타자를 제한하여 차이를 미봉하는 것이다. 진보란 타자와 차이성에 나 자신을 과감히 노출하는 것이다. 퇴보란 타자와 불일치를 혐오하여 자아를 차폐하는 것이다. 사랑은 차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타자에게 무한히 나를 개방하는 것이다.
나는 이연의 변심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변심에 불과했다. 변심 이외 다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는 아직 이연을 타자로서 만나지 못했다. 나는 왜 그가 나와 다르게 생각할 가능성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나는 미성숙하여 나와 동일성 속에서 그를 제한했다. 나는 그가 궁극적으로 내 인식 그물에 완전히 포획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했다.
나는 그를 언젠가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물로 전락시켰다. 이것은 폭력이며 파시즘이며 독재이다. 손에 쥘 수 없어 안달이 났고 절망했고 화가 났다. 그와 불일치를 두려워하였으며 무한히 퇴행했다. 차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난폭해졌다. 진보도 없었고 그리하여 사랑도 없었고 인식도 없었다.
나는 상처 입었다. 전의를 상실했다. 애무든 입맞춤이든 섹스든 모든 점령 기획을 폐기했다. 나는 그가 결코 소유할 수도 포획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오직 또 다른 자아로서 당당히 내 앞에 서 있다. 내 느낌과 감정과 신념은 그의 느낌과 감정과 믿음과 완고하게 불일치했다. 나는 불일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바로 그 차이에 의해 열린 오류의 공간이다. 이 공간을 나는 은총의 공간으로 받아들인다. 그와 나 사이의 이 공간 속으로 진리가 강림했다. 이 공간 속으로 빛이 들어왔다. 네가 보였다. 이제 다시 너를 처음 만났다. 이연은 완전히 나를 떠났지만 비로소 나는 타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연, 너를 너무 늦게 만나고 있다. 그것은 변함없이 외로운 만남이다. 변한 것이 있다. 나는 예전보다 나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나의 불안과 욕심과 허풍과 변덕을 더 잘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이 나에 관한 진실이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만큼 해방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래된 거울 앞에 남루한 육체로 서 있다. 그러나 상징과 이미지와 환상과 허상과 허위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 확실성은 요원하지만 치명적인 오류를 피하는 지혜를 얻었다. 이연, 너를 너무 늦게라도 만나 다행이고 축복이다.
마루와 벼루가 책장 꼭대기에 올라가 잠을 자고 있다. 짙은 햇살이 방을 빽빽이 채우고 있다. 신록이 원거리에서 반짝거린다. 소나무 꽃가루가 모니터에 노랗게 자옥 앉아 있다. 천 리, 만 리 멀어져 간 이연을 생각한다. 오류의 공간, 진리의 여백은 그 거리만큼 넓다. 그 거리만큼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은하수가 선명히 보이는 소백산 아래 눕고 싶다. 풀이 볼을 가르고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 때 은하수만큼 멀리 가버린 너를 또 다시 만나고 싶다. 너는 아직 해독되지 못한 나의 블랙박스이다. 나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 헤매고 너는 영원한 사랑을 찾아 쉬고 있다.
너는 나의 블랙박스
